1995년 10월 19일 오전 국회는 당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꺼내 든 한 장의 은행 잔고조회표로 발칵 뒤집혔다.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성공한 쿠데타도 역사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전례를 남기는 데 촉매가 됐던 이른바 노태우 비자금 사건 수사의 신호탄이었다.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뒤 증권가에서는 이미 전직 대통령 비자금조성설이 나돌았지만 `물증'이 드러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노씨 측은 박 의원의 의혹 제기에 대해 `전혀 무관한 얘기', `예금주로 거론된 사람도 전혀 알지 못한다', `명예를 실추시킨 데 대해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한다'며 일단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러나 당시 신한은행 이사가 서소문지점장 재직시 300억 원이 입금된 차명계좌를 개설한 사실이 있다고 증언하면서 이 사건은 단순히 `의혹제기' 차원에서 덮어둘 수 없게 됐다. 대검 중수부는 이튿날 내사에 착수했고, 수사 착수 이틀 만에 노씨의 경호실장이었던 이현우씨가 검찰에 자진 출두해 `재임 중 조성해 사용하다 남은 통치자금'이라고 털어놓으면서 수사는 급진전했다. 비자금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노씨는 결국 10월 27일 비자금 실체를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검찰은 수사 착수 2주만에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노씨를 소환 조사했고 그 뒤 한달 가까운 기간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등 노씨에게 비자금을 건넨 재벌총수 36명을 불러 조사했다. 노씨는 포괄적 의미의 뇌물죄가 적용돼 1995년 11월 16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혐의로 구속됐고, 검찰은 노씨 비자금이 4천100억 원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노씨 비자금 사건으로 정치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김영삼 정부는 12ㆍ12, 5ㆍ18 특별법 제정을 지시, 쿠데타와 통치자금을 단죄했고 노씨에 이어 구속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검찰은 앞서 12ㆍ12 쿠데타에 대해서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기소유예 처분을, 5ㆍ18 광주항쟁 시민학살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려 이들에 대한 국민적 처벌 요구를 애써 외면했지만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여론에 밀려 수사에 나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12월 20일, 대법원 최종 판결이 난 지 8개월여만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두 사람에 대한 사면을 합의, 발표했고 이로써 비자금 사건은 하나의 역사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노씨에 대해 선고한 2천628억 원의 추징금 중 일부는 여전히 미납 상태여서 사실상 아직도 이 사건은 진행형인 셈이다. 검찰은 10년 동안 노씨로부터 2천97억9천614만 원을 추징했지만 아직 519억 원이 더 남아있다. 검찰은 1995년 12월께 노씨 본인 명의 등으로 된 경기도 안양의 토지와 고향인 경북 소재 아파트 등 부동산 9건을 찾아내고도 전부 환수하지 않고 일부는 노씨가 몰래 매각할 수 없도록 추징보전 처분만 취해놓고 남겨두었다. 추징시효 기간인 3년 내에 노씨로부터 환수할 새로운 비자금 등을 찾아내지 못하면 추징시효가 완성돼 더 이상 추징할 수 없게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치다. 반면 전씨는 추징금 2천205억 원 중 4분의 1이 채 안되는 533억 원만 납부했다. 그는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는 웃지못할 주장을 펼치며 추징금 징수에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한편 노씨 비자금 사건 당시 관심을 끌었던 통치자금 900억원의 용처와 1992년 대선 자금 지원 의혹은 전ㆍ노씨 두 사람의 사면ㆍ복권과 함께 정권이 두 번 교체되는 동안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됐다. (서울=연합뉴스) 이광철 기자 minor@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