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수 < 디지털경제硏ㆍ이사장 > 신언서판(身言書判)은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뽑는 시험에서 인물의 평가기준으로 삼았던 몸(體貌), 말씨(言辯), 글씨(筆跡), 판단(文理)을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은 풀이한다. 당 태종 이세민은 형제를 죽이고 등극했지만 과거제도를 통해 신언서판을 갖춘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반란을 막고 경제를 부흥시켜 중국 역사상 선정으로 일컬어지는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루었다고 한다. 정관지치를 이룬 핵심 장치가 됐던 과거제도와 함께 신언서판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인재등용과 사람 평가의 잣대가 돼왔다. 덕을 갖춘 선비를 '신언서판을 갖춘 사람'이라 말해왔다. 중학교 때 한문시간에 수염을 기른 근엄한 한문선생이 흑판에 '身言書判'이라고 써 놓고는, 항상 신언서판이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학창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강의 중 하나다. 인상이 좋고 말씨가 고운 사람을 친구로 삼고 가까이 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하고 신언서판 순서대로 인상이 가장 중요하고 다음은 말씨, 글씨와 판단은 나중이라고 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잘 생겨도 주는 것 없이 미운 '밉상'도 있고, 생긴 대로 노는 '꼴값'도 있다. 얼굴 상이 왠지 궁핍해 보이거나, 정직성이 없어 보이거나, 기가 빠져 있는 얼굴을 가진 사람들은 끝이 좋지 않은 것을 많이 본다. 얼굴 중에서도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데 눈이 맑고 잔잔한 사람은 영혼이 맑고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 눈이 어둡거나 눈동자를 자주 굴리는 사람은 정서가 불안한 사람이라고 한다. 40대가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에서 보듯이 인상은 마음가짐과 몸가짐에 따라 얼마든지 좋게도 나쁘게도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하니 타고난 얼굴을 탓할 필요는 없다. 헛말을 잘하는 '실없쟁이', 쌍말을 해대는 '쌍것', 품위 없이 말하는 '무지렁이', 엉뚱한 말을 해대는 '또라이', 분별 없이 말하는 '싸가지' 등 생김새보다 말씨에 따라 사람을 부르는 말이 더 많은 것 같다. 만날 때는 인상이 중요하지만 만나고 나서 살다보면 말씨가 더 중요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가까이 지내다가도 한마디 말에 속이 상하고 미워지는 일이 많다. 수고했다는 상사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밤샘의 피로를 녹여주고 정나미 떨어지는 말 한마디에 두고두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친구를 만났을 때 하고많은 덕담 다 두고 머리털이 빠졌다거나 살이 쪘다고 상대방의 약점부터 들먹이는 사람은 정말로 '싸가지'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진 경우도 있었고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로 상처를 준 경우가 나도 많았던 것 같다. 옛날에는 말씨로 양반과 상놈이 구분됐다는데 요즘 우리들 말씨가 자꾸 '쌍말' 수준으로 하향평준화 돼가는 것 같다. 정제되지 않은 말씨로 세상이 너무 어지러운 것 같다.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한 수 위"라고 말 한번 잘못한 연예인은 방송에서 퇴출되기도 했다. 우리의 역사왜곡을 지적한 어떤 교수에 대해 "X구멍에 호스 꽂아서 아가리로 물 나오게 해라,X X놈아"라는 댓글에서는 섬뜩한 살기가 돈다. 사회지도층도 이에 못지 않은 것 같다. 친미파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을 신문이 비판한 것을 두고 "언론의 안보장사"로 몰아붙이는 것은 도를 넘어선 것 같다. 서울시가 5ㆍ18 민주화운동단체의 요청에 따라 홍보탑에 '경축'이라고 쓴 것을 두고 확인도 없이 서울시에다 대고 "천박한 역사 의식"이라고 비난한 정치권의 논평은 과연 누가 천박한지? 요즘에 와서 눈과 코를 고치며 '신'을 뜯어 고치는 노력은 많은데 말을 다듬는 '언'의 노력은 부족한 것 같다. 머리칼 색깔을 노랗게 바꾸거나 배꼽이 나오는 옷을 입는 여자들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됐다. 세상 모두 '신'을 가꾸는 데만 몰두하는 것 같다. 아무리 '신'이 버젓해도 '언'을 잘못하면 '실없쟁이''또라이''싸가지'가 된다. '신언서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요 세상살이의 길잡이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