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수 전 재정경제부(옛 재정경제원) 차관이 저술한 회고록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은 그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역사의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실패는 되풀이 말아야 한다'는 동기에서 쓰여졌다. 이에 따라 개발독재에서 외환위기 때까지 경제 정책이 수시로 정치권의 입김에 의해 흔들리고 전문성 부족으로 좌충우돌했던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야말로 1970년대초 일선 세무서 시절에는 국정감사를 하러 들른 국회의원들을 위해 채홍사 역할까지 해야 했던 당시의 그릇된 현실까지 소개했으며 외환위기 때는 재경부 차관으로서 협상단을 이끌면서 알게 된 `뒷 이야기'도 담았다. ◆IMF 위기전 정책 헛발질 `연속' 강 전 차관은 외환위기의 핵심 원인으로 고평가된 환율과 8% 단일관세율을 지목 했다. 그는 수입이 늘고 수출은 감소해 1994년부터 경상수지 적자가 쌓이기 시작했으 나 경제 정책은 물가와 성장률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대외 불균형 문제가 심각해졌 다고 분석했다. 외환위기 한 해 전인 1996년 정부는 성장률 7.5%, 물가 4.5%, 경상적자 60억달 러의 세마리 토끼를 잡는다고 큰소리 쳤고 한은도 헛소리 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 그 해 5월 KDI의 `21세기 경제장기구상'은 헛소리의 백미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96년 12월 통상산업부 차관을 맡으면서 환율 절하의 시급성을 느꼈으나 재 정경제부에 건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통상산업부는 기업경영의 일선에 있었기 때문에 기업에 관한 문제를 다른 부처보다 먼저, 정확히 알고 있었으나 한국은행과 재경부는 아무래도 한발 느리고 정확성도 떨어졌다고 전했다. 그는 97년 3월 재경부 차관으로 옮기면서 환율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나 쉽 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은행법 개정으로 감정이 악화돼 있는 한국은행과의 협력 관계가 원만 하지 않은 가운데 전화로 환율이 900원 넘어가도록 그대로 두라고 한은에 요구했으 나 이 중앙은행 간부는 "890원은 마지노선이다. 그 이상은 절대 안된다"고 답변했다 고 전했다. 한은법 개정 등 금융개혁 추진은 김영삼 대통령 연두회견때 발표됐으나 재정경 제부는 모르게 터진 빅뱅이라고 소개했다. 기아자동차가 97년 7월15일 부도유예협약에 들어간 뒤 김선홍 회장이 물러나지 않고 버티자 당시 외부적으로는 강경식 장관이 김선홍 회장이 힘겨루기를 한 것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청와대, 여.야당의 대권후보들과 대결한 것이라고 전했다. ◆아쉬움 남는 IMF 협상 강 전차관은 위환위기 당시 IMF와의 협상과정도 자세히 소개했다. 97년 11월19일 취임한 임창열 장관은 오후 6시에 `금융시장 안정 및 금융산업 구조조정 종합대책'을 발표했으나 전임 강경식 장관이 만들어 놓은 발표문에서 IMF 에 대한 자금요청과 환율변동폭 축소 등의 핵심 내용이 빠져있었다고 밝혔다. 결국 이틀 뒤인 21일 임 장관은 IMF 자금 요청을 발표했다. 28일에는 임 장관이 차관 문제로 일본에 출장가 있는 도중 김영삼 대통령이 "빨 리 협상을 끝내라"는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곧바로 자신에게 협상을 서두르라고 지시, 차관 신분으로서 잠정 합의를 이끌어 냈으나 나중에 갈등이 불거 지면서 요구사항이 추가됐던 정황도 전했다. 아울러 외국은행 지점장 등의 충고를 듣고 외채조정 협상을 1997년 12월19일 서 울에서 시작해 정부 보증에 의한 만기연장을 합의했으나 주도권이 갑자기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뉴욕에서 외채조정 협상을 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강 전 차관은 외채협상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1998년 1월21일 개시된 뉴욕 외채협상에서는 칼자루를 우리가 잡은 상황이었으 나 당시 자문역으로 동행한 미국 컨설팅사 대표가 "좀더 유리한 내용으로 할 수 있 었는데 한국 대표들이 상황을 잘못 파악해 쉽게 승낙한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고 말 했다고 전했다. 그는 외채협상의 승자는 한국정부가 아니라 국제 채권은행단이었으며 과거 멕시 코나 브라질에는 국제 채권은행단이 대출원금을 10∼30%씩 탕감해 주고 금리도 낮춰 줬는데, 한국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는 금융전문가들의 평가를 전했다. 특히 제일은행 매각에 대해 당시 전액 감자후 매각이나 청산 등 조치를 바로 취 했다면 15조원이상의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상황으로 전개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인 수한 뉴브리지캐피털에는 부실이 많으면 정부에 넘기고 부실이 적으면 먹는 `꽃놀이 패'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캉드쉬 당시 IMF 총재가 정리해고를 최소화 해야 한다고 강조한 내용 등을 전하면서 IMF를 믿었어야 했고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신뢰를 잃지 말았어야 했었 다고 지적했다. 그는 외환위기는 고비용.저효율의 구조적 위기이고 1년만에 끝날 성질이 아니었 다면서 이는 외국이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에서 9년만에 2만달러로 올라섰는데 비 해 한국은 9년째 게걸음을 하고 있는데서도 입증된다고 말했다. ◆화려함뒤 좌절 많았던 공직생활 강 전 차관은 1970년 공직에 처음 발을 내디뎌 부임한 경주세무서 생활을 술회 하면서 하숙비가 한달에 1만8천원일 때 봉급은 2만원이어서 목민관으로 일하려던 뜻 에 좌절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특히 당시 국정감사를 하러 내려와 불국사관광호텔에 머무는 국회의원들을 위해 채홍사 노릇까지 하다가 기자들에게 들켜 홍역을 치렀다고 전했다. 그는 또 쌀이 모자란 시절이어서 분식을 해야하는 수요일에 기관장 환송연을 하 면서 밥을 먹은 사실이 방송에 보도됐던 일도 소개했다. 1995년 대통령 연두회견 이후 추진된 부동산실명제는 요란하게 취급됐을 뿐, 한 건의 `해프닝'에 가까운 정책이었다고 평가절하했다. 또 1993년부터 8% 단일관세율이 적용돼 왔는데 1995년 세제실장으로서 관세법을 개 정하려다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시했다. 금융실명제는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제도로 도입됐으나 정치보복의 칼로 더 많이 사용되어 정치갈등을 확대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대통령에 직보하는 자리로 통했던 이재국장 시절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싶은 일 보다 잊고 싶은 일이 더 많았다. 성공한 시도보다 실패한 시도가 많았고 시도도 못 해보고 묻혀버린 것이 더 많았다"고 밝혔다. 특히 1991년 2월 한보그룹의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사건이 터졌을 때 청와대 의 개입 정도를 몰라 이재국장으로서 실무적인 판단으로 자금관리를 했다고 전했다. (서울=연합뉴스) 윤근영.경수현기자 eva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