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여러분,지난 2년간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주말 취임2주년 국회연설을 이렇게 시작했다. 집권 이후 쏟아진 국내외 악재속에서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경제적 고통을 솔직하게 인정하고,보다 성숙한 국정을 다짐한 대통령의 연설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개혁의 '성역'으로 남아 있는 교육과 의료부문에 과감한 개방과 경쟁체제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노동계와 시민단체에 '대안을 내놓는 창조적 참여'를 당부한 대목은 대통령의 '코드 전환 예고'로까지 해석되면서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대통령이 올해를 '혁신 제도화의 해'로 선언한 대목에 더욱 관심이 간다. 정부 경쟁력 향상을 언급하면서 내놓은 얘기지만,취임 이후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에 걸쳐 '개혁'과 '혁신'의 이름으로 내놓은 조치들이 취지와 다르게 해당 분야를 옥죄고 메마르게 만든 사례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들어서의 '아젠다 과잉·개혁진도 과잉' 문제는 최근 집권당 내에서조차 확산되고 있는 정치자금법 개정 논란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여당 핵심 간부는 최근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현행 정치자금법은 너무 비현실적"이라며 "어떻게 지역구 경로당에 가서 음료수 한 잔 못사주고 돌아올 수가 있나"고 개탄했다고 한다. "개혁을 바라는 여론을 의식하면서 대세가 그렇게 기우는 바람에 법안이 통과됐지만,현실에 맞게 고칠 건 고쳐야 한다"며 스스로 '개혁의 덫'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현실을 외면한 개혁원론 집착과 강행에 따른 폐해는 경제부문이 더 심각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건 경제건 '현실'의 세계에서는 '이론지(理論知·explicit knowledge)'가 아닌 '현장지(現場知·tacit knowledge)'가 더 존중돼야 하며,교조적인 이론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나라들은 한결같이 퇴행의 비운을 겪고 말았다는 게 경제석학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탁견이다. 여당 의원들이 자신들의 정치현장에서 절감하고 있는 '이론지의 한계'는 기업들이 '공정경쟁'의 명분론적 당위에 눌려 자유로운 투자를 구속받고,'약자보호'의 구호 아래 노조에 휘둘리고 있는 현실에서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닫는 게 시급하다. 정부에 한 가지 더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의 회고록을 참고해보란 말씀이다. 재임기간 8년동안 뉴욕의 치안을 안정시키고 대표적 슬럼지역인 할렘을 쇼핑지역으로 변모시킨 줄리아니는 회고록에서 '선택과 집중'을 성공비결로 꼽았다. "공약은 적게,실천은 그 이상으로(Underpromise and overdeliver)"를 강조한 대목도 인상깊다. 줄리아니의 뉴욕시장 취임 직후인 1993년 뉴욕타임스의 여론 조사에서 시민의 62%가 "생활이 나빠졌다"고 응답했고,타임지의 설문에서는 59%가 "할 수만 있다면 뉴욕을 떠나겠다"고 밝힐 정도로 상황은 최악이었다. 그는 이같은 난관을 거대담론이 아닌 '작은 실천(start small with success)'으로 풀겠다고 다짐했고,할렘의 교회 지도자와 흑인상공인들을 설득해 '노상 부랑행위 자율단속' 선언을 이끌어내는 등 소리없는 개혁으로 뉴욕 거리풍경을 바꿔놓았다고 회고했다. 큰 얘기와 이상주의적 담론,그 결과 야기되는 과대공약·개혁진도 과잉에 빠져 한국이 겪고 있는 불필요한 비용이 있다면 즉시 빠져나오는 것도 '개혁'이다. 선진한국 실현을 남은 3년의 국정과제로 제시한 대통령과 당·정 지도부에 그 용기를 주문하고 싶다. 이학영 경제부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