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만난 40대 후반의 한 대기업 중역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동창회에 나갔다 깜짝 놀랐어요. 평소 30∼40명이던 참석인원이 이 날은 60명을 넘더라고요. 모두들 반가워 떠들었지만 내심으론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더군요. 참석자중 절반가량이 할 일 없는 백수였거든요. 백수에게 전화까지 하면서 참석해 달라는 곳은 동창회밖에 없다나요." 50대 초반의 또 다른 기업 중역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종종 얼굴을 대하는 동창생 친구가 한 열명쯤 됩니다. 그런데 나와 또다른 두 사람을 빼고는 모두 일자리가 없어요. 이제 나도 물러날 때가 됐다는 얘기지요." 지난해 마음고생이 가장 심했던 연령층을 꼽으라면 역시 사오정(45세 정년) 세대가 아닐까 싶다. 자식들은 이제 겨우 중고등학교에 다니거나 빨라도 대학을 마친 경우가 거의 없는데 직장에서는 언제 쫓겨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형편이니 인생의 낙이 있을 리 없다. 자식들 학비나 제대로 댈 수 있을지,하루하루 버티기도 힘겨운데 남은 20∼30년은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불안감이 높아지는 데 비례해 어깨는 점점 처져만 간다. 위로부터 눌리고 아래로부터 치받치다 보니 자존심은 헌신짝처럼 내던진 채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며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는 불쌍한 군상들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또 복권도 사보지만 언제나 역시나로 끝날 뿐이다. 인생을 놓고 보면 중년은 절정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젊은이들처럼 패기만으로 무모한 일을 벌일 만큼 어리석지도 않고 노인들처럼 체력이 약한 것도 아니다. 직장에서도 풍부한 경험에서 축적된 지혜를 바탕으로 작은 정보를 가지고도 큰 일을 추론할 수 있고 회사 전체를 배려하면서 업무를 진행하는 넓은 시야도 갖고 있다. 그런 중년들이 밀려난다는 것은 곧 이들의 다양한 경험과 축적된 노하우가 그대로 사장된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사오정 세대가 설 자리를 잃은 것은 기업 차원에서 보든 국가 차원에서 보든 정말 커다란 불행이 아닐 수 없다는 이야기다. 허리가 결딴난 몸이 온전할 리 없듯이 허리 세대가 무너진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리 만무하다. 때문에 사오정 세대를 다시 뛸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의 최우선 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기를 살려야 가정에서 웃음이 피어나고 사회도 활력이 넘쳐나게 된다. 젊은이들의 패기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중년들의 경험과 판단력을 접합시켜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 45세가 정년이 되는 사회가 아니라 45세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회로 바꿔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올해는 정부는 정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이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최대한 찾아내고 또 그것이 지체없이 현실화되는 한 해가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다행히 닭띠 해는 우리에게 괜찮은 해들이었다. 1945년엔 광복이 이뤄졌고 최근의 경우도 경제성적은 양호한 편이었다. 81년엔 경제성장률이 6.2%를 기록하고 주가는 한햇동안 22.8%나 뛰어올랐다. 93년에도 성장률은 5.5%라는 견조한 수준을 나타냈고 주가 상승률은 90년대 전반기로서는 최고 수준인 27.6%에 이르렀다. 닭울음소리에 새벽잠을 깨듯 을유년 새해에는 경제가 깨어나고 일자리가 늘어나고 그리하여 축 늘어진 사오정 세대들의 어깨도 활짝 펴졌으면 한다. 이봉구 논설위원 b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