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입양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6.25전쟁으로 10여만명에 이르는 전쟁고아와 혼혈아가 생겼고,이후에는 가난 때문에,지금에 와서는 미혼모와 이혼가정이 급증하면서 버려지는 아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국내에서 입양을 꺼리는 탓에 외국인 양부모를 찾아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

'입양아 수출'이 아직도 세계 3위라는 사실은 경제규모에 견주어 볼 때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한국아이들의 해외입양은 한 외국인에 의해 시작됐다.

미국 오리건주의 농부였던 해리홀트씨는 우연한 기회에 한국전쟁과 고아들에 대한 슬라이드를 보고 혼혈아 8명을 입양했다.

이를 계기로 '홀트재단'이 만들어졌고 그는 아예 한국으로 이주해서 평생을 살았다.

현재는 홀트씨의 딸인 말리 홀트가 대를 이어 입양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홀트재단을 통해 해외로 보내진 아이들만도 10만명이나 된다.

해외입양 50년을 맞아 지난 주 서울에서는 '세계한인입양인대회'가 열렸다.

한결같이 밝은 모습들이었지만 그들을 보는 감회는 착잡했다.

우리가 외면한 입양아들이 낯선 이국 땅에서 '나는 누구인가'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또 생부모를 그리워하면서 보냈을 과거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뿐이다.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는 해외 양부모들의 헌신속에서 자랐지만 마음고생은 오죽했을까 싶다.

그간 우리 정부도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기 위해 여러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사회적 인습에 부딪쳐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장애아의 입양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두 다리가 없이 의족에 의지한 채 쾌활한 모습을 보여 감동을 주었던 애덤 킹의 양부모는 무려 8명이나 되는 장애아를 키우는 미국인이다.

그 양부모의 모습에 얼마나 감동했던가.

고국이 제대로 키워내지 못한 해외 입양아는 20여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늦었지만 이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일은 조국의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날 버렸지만 그래도 사랑해요"하는 입양아들의 절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