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DJ) 전 대통령의 이념과 정치철학을 계승한 `적자정당'을 자처했던 민주당이 17대 총선의 참패로 창당 4년 4개월만에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됐다. 민주당 추미애(秋美愛) 선대위원장은 선거운동 기간 내내 햇볕정책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DJ이념의 적자 정당임을 전면에 내걸었고 김 전 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金弘一) 의원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추 위원장과 행보를 같이 했으나, 전통 지지층의 지지를 다시 결집해내는 데 실패했다. 열린우리당은 전북과 광주를 석권한 데 이어 DJ의 그림자가 가장 짙은 전남에서도 민주당보다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 호남의 유권자들은 햇볕정책의 깃발을 내걸고 DJ의 향수를 자극하면서 지역정서에 기대려 한 민주당보다는 햇볕정책의 계승을 말하면서도 지역주의 극복과 전국정당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정치적 복권을 외친 열린우리당을 선택한 셈이다. 민주당 사람들은 선거전이 열세에 몰리자 김 전 대통령이 나서서 `한 마디'만 해줄 것을 기대하며 동교동쪽에 애처로운 시선을 보냈으나, 김 전 대통령은 현실정치에 일절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끝내 입을 다물었다. 김 전 대통령측 김한정 비서관은 민주당의 햇볕정책 적자론에 대해 "햇볕정책은 공공재"라며 특정 정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특정 정파의 대표자가 아니라 남북간 화해와 협력,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킨 대통령으로서 역사에 기록되고 싶어하는 김 전 대통령으로서는 4년전 천년을 이어가리라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자신의 손으로 만든 민주당이 몰락해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민주당은 총선에 참패했지만, 여전히 햇볕정책을 말하고 있다. 추 위원장은 "원점에서 새롭게 출발해 평화민주개혁 세력의 본산으로 부활하겠다"고 말했고, 장전형(張全亨) 선대위 대변인은 "지난 50년간 지켜온 평화개혁세력이라는 민주당만의 존립가치를 계속 지켜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비록 선거전략에 불과했을망정 DJ 이념의 계승을 소리높여 외친 민주당이 원내교섭단체 구성조차 못할 정도로 참패한 것은 DJ의 정치적 영향력의 약화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지난해 9월 분당후 호남 표심을 얻기 위해 DJ를 상대로 구애 경쟁을 벌일 때 DJ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통령 재임시보다 높았을 정도로 상종가를 누렸지만, 총선 이후 그같은 상황이 다시 재현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DJ 스스로 현실 정치에 대한 끈을 거두고 역사책 속으로 걸어들어가기를 택한 것이라면 옳은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증명됐듯이 역사의 수레바퀴는 역주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연합뉴스) 맹찬형 기자 mangel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