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선진국 수준의 경영권 방어 시스템 구축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나선 것은,우리 기업들이 직면한 현실 상황이 그만큼 힘들고 다급한 탓으로 풀이된다. 국내외 투기자본들이 국내 우량기업 주식을 공격적으로 매집한 뒤 경영권을 위협하거나 거액의 보상을 요구하는 사례가 자주 일어나는 바람에 본연의 기업활동이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정부당국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도개선을 미루고만 있기 때문이다. 국제 투기자본의 움직임이 갈수록 빨라지고 공격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마당에,당국의 현실인식은 세계화 시대에 걸맞지 않게 구태의연하고 편향돼 있어 이대로는 국가경쟁력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국내 10대 그룹의 경우 주식 시가총액에서 외국인 지분의 비중은 평균 40%를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또한 외국인들이 5%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는 상장사 수가 1백20여개에 달하며,이중 상당수는 외국인 지분이 경영권 향방에 결정적인 변수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 주주들이 담합할 경우 해당 기업들의 경영권이 위협 받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며,심지어는 국내 최우량기업인 삼성전자조차도 이같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형편이다. 또한 경영권 방어 차원에서 자사주 매입을 늘릴 경우 자금부담이 가중돼 가뜩이나 위축된 투자의욕이 더욱 냉각될 가능성도 적지 않아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대기업 그룹계열 금융회사들의 보유지분에 대해 제한적으로 허용했던 의결권을 다시 규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정위 측은 실제 인수·합병과 관련한 의결권 행사가 전체의 30% 수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인수·합병이 일상적인 현상이 아닌데다 적대적 인수·합병 시도를 예방하는 효과까지 감안한다면 그 필요성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더 나아가 우리도 선진국에서 광범위하게 허용하고 있는 차등의결권 주식, 저가의 신주인수 선택권, 법인간 상호 주식 보유 등 적대적인 인수·합병 시도에 대한 방어수단을 서둘러 도입할 필요가 있다. 정부당국은 타이거 펀드가 매집한 SK텔레콤 지분을 이용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올렸고,최근에는 영국계 펀드인 소버린이 ㈜SK의 경영권 장악을 노리는 등 기업경영 환경이 크게 악화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재계 건의를 참고해서 효율적이고 강력한 경영권방어 시스템을 하루빨리 구축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