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대기업의 시스템엔지니어 자리를 1990년 박차고 나왔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고도 중요한 결단이었다. 젊은 패기와 뭔가를 이뤄보겠다는 야무진 꿈 하나만을 믿고 용기를 낸 것이다. 퇴직후 직장동료 2명과 트리정보시스템을 창업했다. 1년후 동료에게 물려주고 프리랜서 생활을 하며 사업구상과 창업준비를 했다. "벤처"라는 용어도 생소했던 시절인 1992년 3월 누리텔레콤의 전신인 에이티아이시스템을 설립했다. 서울 강남역 부근의 10평 남짓한 오피스텔에서 야전침대에 잠깐 눈을 부치고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며 개발에만 전념했던 시절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행복한 때로 기억된다. 그러나 밤잠을 설쳐가며 개발했던 인터넷 웹브라우저를 빌 게이츠가 공짜로 사용하도록 배포해 버리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개발비만 날려버렸다. 그때의 허탈함이란... 이후에도 또 한번 마이크로소프트 때문에 개발해놓고 제대로 팔아보지도 못한 채 사장시켜 버린 일이 발생했다. 이 일을 계기로 나의 사업방향은 크게 달라졌다. 틈새시장으로 눈을 돌려 제품의 전문화에 나서게 되었다. 마케팅 전략을 완전히 바꾼 뒤 처음으로 내놓은 작품이 바로 전산자원 통합 관리시스템인 나스센터(NAS Center). 나스센터는 자동원격검침시스템(AMR) 등 누리텔레콤 주력사업분야의 핵심제품이 되었다. 빌게이츠 때문에 두 번에 걸쳐 쓴 잔을 마셨지만 세 번까지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도전한 것이 결실을 이룬 것이다. 작은 기업이 냉정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이 갖지 못한 독자적인 기술을 보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이 했던 탓에 신시장 개척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지난 봄에는 창립 10주년 행사를 가졌다. 퇴직직원을 초대했다. 자그마한 선물도 준비했다. 고생을 함께 했던 직원들과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고 싶었다. 난 직원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고마움을 표시했다. 열심히 개발하고 제안서를 들고 고객을 찾아가면 "그 제품 어디에 납품했나요"라고 물을 때마다 할 말이 궁했던 창업 초기시절이 생각났다. 처음 개발한 것인데 누가 썼냐고 묻는데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나온 신제품인데 말이다. 다행히 나의 성실함을 믿고 제품을 써 준 고객들이 있었다. 그 고마움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래서인지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고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고객이 찾으면 언제든지 달려간다. 고객의 요구사항이 무엇인지 항상 귀기울이고 최선을 다한다. 지금은 30여개의 대형 고객사를 보유한 어엿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지만 어려웠을 때 나를 믿고 프로젝트를 맡긴 고객들이 없다면 지금의 나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 csm@nuriteleco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