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정치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문자 그대로 점입가경,양대 세력이 대격돌을 벌이고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일은 이들 양대 세력의 후보들이 나름대로 개헌의 복안 내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후보들 가운데 지금 이 시점에서 개헌논의는 적절치 못하다는 견해를 가진 이도 있고,또 개헌 문제로 후보단일화라는 정치적 쾌거를 손상시킬 수 없었기에 '2004년 분권화 개헌'이라는 선에서 양보하여 서둘러 문제를 봉합시킨 민주당처럼,개헌문제 자체가 돌연 부담이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양강(兩强)으로 지목되는 두 후보가 개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헌법의 역사적·현실적 의미나 개헌의 중요성을 새삼 논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 헌정사의 그늘진 단면을 되돌아보는 것은 향후 우리가 좋든 싫든,빠르거나 늦거나 거쳐야 할 개헌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풀어나가는 데 불가결한 일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우리나라 헌법개정의 역사는 권력문제의 역사이자 밀실 담합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역대 헌법개정은 주로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아니면 이원적 집정부제 등과 같은 권력구조의 문제나 가령 대통령제 하에서도 대통령의 지위와 타권력간의 관계를 어떻게 정할 것이냐 하는 권력의 문제에 집중됐고,대부분 밀실에서 실력자의 사전 지침이나 정파간의 담합을 통해 결정됐다. 현행 헌법,즉 1987년 헌법처럼 미리 6·10 항쟁을 통해 대통령직선이라는 큰 틀이 결정된 경우도 있었고,간혹 권력문제에 직결되지 않는 사항들 가운데 다소간 공론화 과정을 통해 결정된 부분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교적 민주적 공간이 열려있던 시기에서조차도 정파간 담합이 중심이 됐고,공론화 과정을 거쳐 개헌이 단행된 예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2년 11월은 민주당과 국민통합 21의 후보단일화 성공이라는 사건으로 기억되기에 족하다. 그들은 국민의 좌절과 허기,기대를 정확히 읽어냈고,이를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충족시킴으로써 결국 흥행에 성공했다. 이것은 단지 이벤트성 흥행의 성공이 아니라 한국정치의 회생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건강한 정치적 캠페인이었다. 그런데 그 후 나온 개헌의 방향과,일정을 둘러싼 알력과 이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도달한 타협의 과정을 지켜보면서,다시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루어진 정략과 야합의 개헌사가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물론 때가 되면 공론화하겠다는 것일 테고,또 국민투표를 거쳐야 하는 이상 공론화는 불가피하다고 말하겠지만,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큰 틀을,물론 집권할 경우지만,먼저 정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현행헌법 중에는 단임제처럼 그 시대적 사명을 완수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는 부분도 없지 않고,경제조항처럼 21세기에 요구되는 새로운 정부의 역할 및 기능에 비추어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부분도 적지 않다. 또 통일정책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다소 개선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렇다면,어차피 차기 대통령의 임기내에 개헌을 할 필요가 있다면,이제는 개헌논의의 시종을 공론화시켜야 할 때다. 후보단일화의 한 대가나,정치적 연합의 연결고리로 미리 개헌의 방향과 일정을 결정하는 일이 위험한 것은 바로 그런 까닭에서다. 어기면 정파간 배신이 되지만,그 약속의 이행을 위해 공론화를 통해 확인된 국민의 여망을 저버릴 수 있는가. 어차피 개헌문제는 누가 통합후보가 될 것인지와 같이,간단명료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또 그것은 서둘러서도 안되고 때를 놓쳐서도 안되는 문제다. 핵심은 합리적 절차와 토론을 거쳐 헌법개정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대선후보들은,특히 개헌문제를 권력문제 못지 않게 권리와 사회정의의 문제,국가와 사회 시스템의 효율성 문제로 다루고,처음부터 끝까지 개방된 구조 아래서 합리적이고 자유 토론을 통해 결정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부 외국학자들이 아직도 고개를 젓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실현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joonh@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