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이 말은 사전 준비를 통해 중요한 가치를 지키라는 의미다.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사유로 소를 잃어버린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재발을 막는 적절한 조치가 강구돼야 하며,그 이전에 원인과 대안에 대한 신중한 검토와 분석이 전제돼야 한다. 이것은 국가와 단체는 물론 개인에게도 적용되는 '도전과 응전'또는 '시행착오의 학습과정'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미국 엔론사 월드컴사 머크사의 회계분식에서 나타났듯이 '투자자 최우선'이라는 미국 자본주의의 가치 역시 '엉성한 말뚝'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과정과 귀결은 우리에게 소중한 간접경험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멀리 갈 것 없이 국제통화기금(IMF) 교훈들이 우리 금융시스템 전반에 충분히 스며들어 있는지 돌아봐야 할 일이다. IMF로 상징되는 우리 경제의 깊은 골은 외형성장에 치중한 재벌 중심의 과소 분산된 경제가 언젠가 거쳐갈 수밖에 없었던 중간역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대기업들이 잇따라 무너지자 정부는 부도유예협약 등 대증요법들을 강구했지만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으며,결국 IMF 지원에 의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 정부는 IMF 세계은행(IBRD) 등과 합의 하에 마련한 '위기극복 플랜'에 따라 부실기업 및 금융회사를 퇴출,합병 등의 방법으로 정리하는 한편 생존 가능성 있는 기업은 구조조정,자본확충과 함께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회계기준과 정보공개원칙을 채택케 했다. 개혁 조치의 하나로 1998년 11월,채권시장의 투명성과 국제화 제고에 목적을 두고 채권 시가평가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당시의 불완전한 시가평가제는 1999년 8월 대우그룹 워크아웃과 함께 20조원에 달하는 대우채권의 부실화,2000년 초 현대그룹 유동성 위기 등 몇 차례 크고 절박했던 위기들을 자양분으로 보다 안정되고 성숙한 현재의 모습을 갖춰왔다. 2000년 6월 민간채권평가사에 대한 인가와 가격 사용의 의무화 등이 그 특징적 면모다. '위기'가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임을 여실히 입증하는 과정이었다. 2000년 말 투기등급에 대한 채권가격 의무사용을 시작으로 2001년 7월 투신운용 및 자산운용사에서 민간시가평가사의 시가정보를 채택했고,2002년 들어 은행 신탁계정과 보험사 특별계정,증권사 역시 시가정보를 채용하게 됐다. 물론 시가평가정보의 적용범위가 아직까지는 제한적이고,내부적으로는 시장 선점을 위한 시가평가사들간의 과당 경쟁 등 시장의 미숙한 면모들이 드러나기도 하지만,전문시가평가사의 본격 등장은 그동안 신뢰성에 상처를 입은 자산운용업계가 빠르게 글로벌 스탠더드에 적응해 가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과거 현재를 거쳐 미래의 비전으로 눈을 돌려보자.시가평가제도와 그 주축을 담당하는 시가평가사는 금융시스템의 투명성을 유지하는 청정제일 뿐더러,투자수단으로서의 채권에 대한 이해와 간접투자시장의 성숙과 발전을 이끄는 기폭제로 자리매김할 것이 기대된다. '투자기관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불편한 제도'라는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시가평가사 스스로 다양한 노력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 시장거래 정보 및 평가 관련 지식 등 채권 관련 노하우를 활용해 투자의사결정에 도움이 되는 창조적 서비스들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올해는 금리 상승과 기업들의 신용도 재편이 예상되는 만큼 시장 및 기업에 대한 리서치 능력이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며,리스크 관리에 기반한 전략적인 운용시스템 구축과 파생상품의 적극적 활용이 시장의 화두가 될 것이다. 경기회복에 따른 설비투자 수요 증가로 점진적 이자율 상승과 채권 약세장 전망이 우세하지만,정확하고 종합적인 정보분석에 기초한 종목과 매매시점의 선택은 적극적 트레이딩과 초과수익의 연결 가능성을 높일 수도 있다. 소를 가둬두는 '죽은 말뚝'의 방어적 기능을 뛰어넘어 자연스럽게 늘어서 안전과 함께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살아 생동하는 나무 울타리'가 채권시가평가사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될 것이다. hjcho@npricing.co.kr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