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온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자신의 집을 위해서나 모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손님이 오면 무의식적으로 살고 있던 자신의 생활습관 등을 타인의 시선으로 한번 돌아보게 되고,타인의 시선으로 자기모습을 바라보면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영위하던 습관 속에 있는 구질구질하고 나쁜 점들이 눈에 띄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본다는 것'과 '보여진다는 것'의 차이점이다. '본다는 것'은 자기의 욕망이나 의지대로 세계를 본다는 것이기에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그러나 '보여진다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눈으로,객관적으로 나를 평가하게 되고 자기반성적이 된다. 성숙한 사람이나 사회는 항상 '본다는 것'과 '보여진다는 것'사이의 차이와 균열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일상적으로 주관과 객관의 조화를 생활화하고 있을 것이다. 자,어쨌든 나도 아침 저녁으로 자유로를 통과해 서울 시내로 진입하면서 타인의 시선,즉 손님의 시선으로 우리의 모습을 이모저모 뜯어보고 있다. 자유로를 달리면서 보는 아름다운 한강변 풍경과 난지도의 녹음은 정말이지 너무도 싱그럽고 푸르름으로 약동하고 있어 심각한 교통 체증만 뺀다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절경(絶景)이다. 난지도가 원래 쓰레기 산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숲으로 변모했는지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는 아! 하고 감탄을 하게 된다. 손님의 눈으로 볼 때 그 감격은 더욱 생생해진다.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와 재활용품들을 이리저리 모아놓고 '설치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미술관 안을 꽉 채워 놓은 것은 외국에서 흔히 보았지만,이렇게 쓰레기 매립장 자체를 예술화,생명화시킨 것은 과문한 탓인지 아직 보지 못했다. 예술로 변신한 난지도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생각한다. 환자였던 쓰레기 산이 이제 오히려 산소와 녹색에 굶주린 현대인을 치유해주는 의사가 된 것이다. 누구의 기적인가? 서울 시청이 만든 기적인가? 아니면 저절로 이루어진 자연치유력의 기적인가? 물론 그 둘 다의 힘도 작용했겠지만 그 기적을 만들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난지도 기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모자를 쓰고 높은 산기슭에서 물을 주거나 나무를 가꾸던 사람들,하얀 머릿수건을 쓰고 도로변에서 꽃 모종을 심거나 잡초를 뽑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떠올랐다. 시인이 그 시를 쓴 것은 일제 강점기 1926년.'개벽'에 발표된 작품으로 원래 제목은 '빼앗긴 땅에도 봄은 오는가'였는데,일제의 검열을 의식해 '땅'을 '들'로 고쳐서 발표했다고 한다. 비록 국토는 빼앗겼지만 민족의 정신이 흐르는 '다정한 자연으로서의 땅'은 결코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을 노래한 아름답고 역동적인 시이다.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제 혼자 어깨춤을 추고 가네./나비 제비야 깝치지 말라/ 맨드램이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든 그들이라 다 보고싶다. //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가튼 부드러운 이 흙을/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조흔 땀조차 흘리고 싶다.' 이 시구(詩句)가 떠오르면 나는 한강이 서울이라는 황폐한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으로 느껴지고,난지도와 자유로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상화 시인이 그리워하던 '지심매든(김매고 있는) 그들'로 느껴진다. 이상화 시인의 시대와 달리 오늘 이 땅은 어느 누구의 강점(强占)에 놓인 것도 아닌 우리의 땅이라는 것이 행복하고 고맙고 당당하게 느껴진다. 자,난지도는 이렇게 자기의 전체 모습을 타인에게 거침없이 다 보여주면서 늠름하게 자기의 일을 하고 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손님이 와도 그렇듯이 늠름하게 자기의 일을 하면 될 것이다. 다만 제발 쩨쩨하고 얌체같은,무뢰한 같고 구두쇠 같은 저질 운전만은 하지 말자.본다는 것과 보여진다는 것의 차이와 틈새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주관과 객관의 조화를 이루며 생활하는 곳,그것이 성숙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sophiak@mail.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