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李箱)은 천재다. 그는 1934년에 발표된 이상한 시 '오감도'에서 이미 21세기 벽두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를 예견한 사람이다. 그는 '까마귀'의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한세기를 훌쩍 뛰어 앞날을 내다 본 인물이다. 그는 일본어로도 시를 썼다. '오감도'에는 13명의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빛나는 시의 주인공으로서 한국전쟁을 겪으며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요절한 천재작가 이상과 달리 이름도 없고 특별한 재주도 없는 아이들인데도 어떻게 그들이 작품에 나올 수 있었을까? 까치와 달리 까마귀는 한국에서 흉조로되 일본에선 길조다. 그렇다면 삼일(3.1)절을 거꾸로 읽고 일삼(13)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일했던 이상은 혹시 친일파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숨은 애국자였나. 최근 신문에 발표됐던 친일파의 명단에 문인으로는 과연 누가 들어갔을까? 어쨌든 '오감도'의 아이들은 까마귀다. 까마귀는 까마귀로되 널리 멀리 조감할 수 있는 안목과 식견을 갖춘 까마귀들이다. 그것은 바로 2002년 대통령 후보의 경선 출마를 밝힌 여러 주인공들의 수사적 표현이다. 눈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려보자. 답답할 때는 어두운 영화관이 그래도 화끈하다. '오션스 일레븐'에 등장하는 까마귀들은 모두 11마리다. 왜 열세마리가 아니고 열한마리일까? 배경이 미국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의 무대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쇼가 펼쳐지는 라스베이거스다. 미희들이 쭉쭉 뻗은 두다리를 11로 보여준다. 그러니 돈이 넘쳐흐르고 길은 사방으로 뚫려 있다. 길은 결코 막다른 골목일 수 없다. 그렇기는커녕 서부의 모든 길은 라스베이거스로 통한다. 그 열한마리의 까마귀 가운데 한마리의 암컷이 유독 눈에 뜨인다.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다른 열명의 사내들은 아무리 용을 써보았자 그녀를 압도할 수 없다. 연습할 때는 아무 일 없다가 막상 일이 벌어지면 그만 코를 다친다. 11명 가운데 한명인 중국인 곡예사를 보면 그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하마터면 큰일을 망칠 뻔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는 곳은 한국이다. 미국은 한국과는 사정이 다르다. 미국에서 산통을 깨는 것은 오히려 남자 쪽이다. 여자는 다르다. 그녀,남자를 떠나 다른 남자한테 갔다가 다시 그 남자한테 돌아 온 여자,뛰고 나는 다른 아해(兒孩)들과는 달리 그녀는 사실 특별한 재주도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뭇 사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신이 점지한 인물일까? 그리고 결국 이 땅의 모든 어린 관객/아해들 또한 그녀의 마력에 사로잡힐 것인지 두렵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땅,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 라스베이거스의 물신(物神),그 신의 손길/점지(點指)가 심히 불길하도다. 게다가 지금 지구촌에는 '네 마리의 악마'(혹시 그들은 별 볼 일 없는 까마귀들이 아닐까?)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않은가! 아,영화관 속도 비좁기는 마찬가질세. 내가 속물이니 세상이 두루 답답하구나. 그래도 우리가 기대할 인물이 아직 한사람 있다. 2001년의 인물은 빈 라덴이었다. 2002년의 인물은 바로 우리의 이웃. 여자는 아예 무시하고 오직 11명의 건장한 사내들만 이끌고 미국이라는 거인 골리앗과 싸울 다윗,유럽에서 온 그 남자가 있다. 5월을 기다리는 사람은 무척 많을 것이다. 우리는 어쨌거나 이미 미국 사람들보다 한발 뒤졌다. 그들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을 동원해 '오션스 일레븐'을 제작,전세계에 배포하고 있다. 그들은 이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월드컵 경기에서도 또 이길 것이다. 사상 최대의 달러 강탈작전이 실현되는 이 미국 영화를 나는 지난 1월 독일에서 보았다. 뮌헨의 영화관은 열세살 전후의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후기 '모네'의 전시회며 '데 키리코'와 그 동생,두 전위예술가의 전시회가 열린 미술관에는 또 어른들로 붐비고 있었다. 6월이 되어 월드컵 경기장에만 인파가 몰려든다면,그리고 그 때를 전후로 서울의 하늘에는 까마귀 떼들이 황사 속을 날아다니게 된다면,우리는 과연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sanmoe@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