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냄새 술 냄새로 얼룩진 세밑이다. 언제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가 있었을까마는 올해도 괴로운 일 잊자는 망년(忘年)모임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좋은 기억력은 놀라운 일이지만,망각하는 능력은 더 위대한 일이다. 망년모임을 많이 해선지 "기억이 안 난다"는 사람들이 많다. '게이트'니 '리스트'니 하는 단어가 독특한 의미로 통하고 있는 세상이지만,기억이 안난다는 데 어쩔 것인가. 경제가 어려워 고생이 심한 한해였다.내년 경제는 좀 나아질 것이란 전망에 귀가 솔깃하다. 경제연구기관들이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상향조정했고,하반기엔 경기회복세가 가시화될 것이라고 했다.하지만 뭔가 걸리는 게 많다. 아르헨티나 사태가 국제금융시장을 뒤흔들 가능성도 엿보인다. 일본 엔화약세 또한 우리에겐 부담이다.내년에 치를 지방선거 국회의원 보선,그리고 결승전이라 할 수 있는 대선 때문에 경제문제가 뒷전으로 밀리거나,선심정책이 남발돼 경제위기를 자초할 수도 있다.월드컵 아시안게임이 치러지는 동안에 사회분위기가 들뜰 가능성도 있다.정부의 임기 마지막 해라는 점도 이러한 우려를 키운다. 그런데 정부는 주5일 근무제를 내년 7월 시행키로 입법추진을 서두르고 있다.이 제도 도입 때 예상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근로자의 복지를 증진시키면서 경제활력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안을 좀더 진지하게 따져보는 게 일의 순서다. 이 문제가 일찍 제기됐지만 쟁점들에 대한 이견이 여전한데 정부가 왜 앞장서서 이 일을 서두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지난달 어느 신문에 주5일 근무제는 서두를 일이 아니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중소기업의 생산현장에는 일할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다. 각국의 예를 보면 실제 근로시간이 40시간 내외인 상황에서 40시간제를 법제화했다. 주40시간제를 실시하는 나라 치고 국민소득 1만5천달러 이하는 동구권이나 중국이외에는 없다. 일하기보다 노는 데에 익숙한 우리사회인데 서두를 게 뭔가. 근로시간 단축이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면 왜 35시간제는 안하는가. 빙하가 출몰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선체가 부실하게 건조된 것도 모른 채 항해를 하다 빙하에 부딪쳐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교훈을 읽어야 한다. '더 잘살기 위해서 또 근로시간 단축을 위해서 지금은 더 열심히 일해야 할 때'라는 게 요지였다. 이 글에 대한 반응은 엄청났다. 의외였다. 항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정치적 냄새가 난다. 어디서 돈 받고 썼느냐.??놈,?새끼,망치로 죽이고 싶다'는 등등 온갖 욕설과 옮기기 어려운 저질 표현이 쏟아졌다. 노동자의 아픔을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식의 곤욕을 경험한 사람들은 필자 주위에도 많다.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생각과는 다른,소수의 성난 목소리가 분위기를 압도하는 현상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문제를 보는 시각과 해결방안은 당연히 다를 수 있다.시각이 다르다고 적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어떤 주장이든 반론이든 당당히 펴고,합의점을 찾든 다른 점을 확인하든 해야 한다.그게 안되면 갈등은 증폭되고 아집과 독선이 판친다. 그런 사회는 내편 네편이 갈려 결국 패거리 짓만 하게 된다. 합리가 들어설 공간이나 타협이 이뤄질 가능성은 없어지는 것이다. 얼굴은 숨긴채 온갖 언어폭력을 즐기는 우리 사회의 버릇은 도대체 언제부터 생겼는가. 조폭이 영화관과 정치판을 강타하고 있는 세상이라 그런가. 연말이면 잊어선 안될 것을 잊자는 모임을 갖고 또 새해에는 뭔가를 바라고 다짐하며, 이런 일을 해마다 반복해서야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잘못된 관행과 행태는 잊을 것이 아니라 고치고 극복해야 한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그걸 잊자는 건 오만이자 기만이다. 농민과 노동자·서민을 위한다는 섣부른 발상과 정책은 결과적으로 그들을 괴롭힐 수 있다. 아르헨티나 사태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치인의 인기영합주의와 사회 각층의 집단이기주의가 한때 세계 7위의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를 오늘과 같은 상황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yoodk9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