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얼 봐도 불꽃이 되고 꽃이 되고 별이 되었던 초등학교 때 3·1절마다 해줬던 영화에는 언제나 독립군이 나왔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온 몸과 온 마음을 던진 사람들을 보고 나선 진짜 궁금해져서 할아버지께 당돌하게 물었었다.

―할아버지는 왜 독립운동 안했어요?

할아버지는 자꾸 미소만 지으셨다.

그 미소가 난감한 나는 진짜진짜 궁금해져서 자꾸자꾸 물었다.

―독립운동은 누구나 해야 되는 거 아니었어요?

―그렇지.

―그런데 왜 안하셨어요?

심문하듯 묻는 어린 손녀딸이 그래도 대견스러웠던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마침내 정직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살기 위해서 못했어….

그때 할아버지는 많은 말을 했지만 그 말만이 남아 있다.

살기 위해서 하지 못했다는 그 말은 못알아들은 말이어서 오래 남은 말이었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은 불법이었다.

법은 정의의 최소한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최소한의 정의도 지키지 않고 체제를 흔든 나쁜 사람들인 셈이다.

차라리 정의로운 사람들은 일제치하에서 판사를 하고 검사를 해서 독립운동이 불법이라고 선언하고 그 대가로 잘 먹고 잘 산 사람들인 셈이다.

그런 상황은 묻게 만든다.

도대체 법이 뭔가….

지난해 16대 총선 당시 총선시민연대가 벌인 낙선운동이 선거법 위반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그 판결은 분명 적법한 것이리라.응어리진 정치를 풀어보겠다고 법을 위반한 사람들은 그 판결 앞에 고개를 숙일까,코웃음을 칠까.

그 판결이 법의 권위를 지켜주는 판결이 될까.

판결문은 단호하다.

낙선운동은 당국의 선거관리 및 지도역량을 정면으로 무력화하는 명백한 위법행위라고.그 판결문으로 당국의 선거관리의 권위가 서고 지도역량이 입증될까, 아니면 낙선운동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부응을 무참히 모독한 걸까.

순사에게 허가받고 독립운동을 한 이가 있을까.

판결문은 단호히 계속된다.

선거법 규정성의 위헌성 여부에 관한 논란도 인정할 수 없다고.글쎄,말이 단호하면 단호할수록 믿음이 생긴다는 느낌보다 힘이 빠진다는 느낌이 든다.

도대체 법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저항권이 실정법을 뛰어넘는 시민의 권리라는 것을 놓친 법관이 살아있는 시대를 호흡하는 시대정신 속의 법관일 수 있을까.

법과 함께 잘 먹고 잘 산 판·검사들이 불법적인 독립운동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법의 힘으로 단호해진 법원이 정치판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시대적인 요구를 중단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적법한 것이지만 비겁한 것이 있다.

정당성은 있지만 위법인 것이 있다.

역사를 끌고 왔던 모든 혁명은 모두 불법이었다.

멀게는 프랑스대혁명에서부터 가깝게는 4·19혁명까지.어디 동학혁명이 적법한 것이었겠는가.

어디 3·1운동이 적법한 것이었겠는가.

어디 유신시대의 민주화운동이 적법한 것이었겠는가.

그 당시에는 꼼짝달싹 불법이고 실패였던 운동들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힘이 되는 걸 보면 아,역사란 분명히 살아있는 생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역사가 살아있는 것일진대 역사 속의 법이 어떻게 살아있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한다.

법의 가장 큰 매력은 혁명이 정말 힘들게 많은 희생을 만들어가며 지키려 하는 정의를 힘 안들이고 가뿐하게 지켜준다는데 있다고. 가장 좋은 법관은 시대정신 속에서 법을 해석할 수 있는 법관이라고.

예수는 바리새인들을 힐책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바리새인처럼 완벽하게 율법을 지킨 성실한 사람들도 없으니까.

그런데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가 왜 그렇게도 법에 죽고 법에 사는 바리새인들을 정죄했을까.

문자적으로 법을 지킴으로써 법의 정신을 죽인 사람들에 대한 힐책이 아니었을까.

법을 지키는 게 법의 목적일 수는 없다.

법의 정신은 법을 지키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삶을 지키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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