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미국에 무선전신(radio)이 출현했다.

사람들은 주식매매를 위해 거래소에 갈 필요가 없게 됐다.

촌사람들은 우체국에 가서, 비즈니스맨은 기차를 타고, 부유층은 대서양 위의 호화유람선에서 공기의 주파에 얹어 주문을 했다.

혁신적 통신수단의 등장은 항상 폭발적인 경제호황을 가져 왔다.

새로운 기술은 실물부문의 생산성을 급격히 향상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했지만, 이와 동시에 주체할 수 없는 투기적 붐을 금융부문에 몰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새 기술이 약속하는 세기(世紀)적인 기회에 편승하려고 사람들은 저축통장을 헐고, 늘어나는 주식수요가 다시 투기장세에 불을 붙이는 기름역할을 한다.

라디오가 됐건 인터넷이 됐건 보다 용이해진 통신도구는 자산의 투기가속화를 유혹하고 흡입하는 송유관이 된다.

그러나 바람을 무한히 수용하는 풍선은 없다.

1929년 11월, 풍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미국인들은 환상서 깨어났다.

그리고 휴지조각이 된 주식증서, 폐허가 된 공장, 일거리 잃은 사람들이 주변에 흩어지는 현실을 오랫동안 보게 됐다.

작년 여름께부터 우리사회에 벤처투자 붐이 불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신기술이 이끄는 벤처가 실물부문의 생산확대를 주도해 수백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해 주길 바랐겠지만, 보다 활활 타오른 것은 투기적 금융장세였다.

코스닥주가가 뛰자 한국적인 광기(狂氣)가 주식시장과 창업투자시장을 덮어버렸다.

아줌마는 적금을 헐고, 대학생은 등록금을 털고, 농민은 영농대출을 받고, 은행원은 고객의 계좌를 빌리고, 건달은 카드빚을 내어 주식투자에 나섰다.

온라인주식거래가 도입된지 수개월만에 사이버트레이딩 비율이 세계 최고가 됐다.

거래량과 주가가 얼마나 폭발했겠는가.

코스닥상장의 황금맥이 있다는 벤처밸리엔 인력과 자금이 무턱대고 몰렸다.

한평생 철강이나 섬유만 하던 기업이 인터넷과 바이오산업에 진출하고, 사채업자가 벤처투자자가 되는 판국이었다.

이 와중(渦中)에 정부까지 나서서 벤처펀드를 주선한다고 덤볐다.

20개월이 지난 지금 열풍은 올 때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새로운 창업자와 투자자는 끊기고, 기왕에 들어온 인력과 자금은 옥석구분없이 하루하루의 생존을 걱정하고 있다.

그나마 업계의 일부에서 고통과 위기의 현 상황을 ''거품이 꺼지고 진정한 벤처가 생성할 시장풍토가 다져지는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은 한국벤처산업의 장래를 위해 긍정적이고 다행한 일이다.

지난 벤처바람에도 물론 공로가 있음이 인정된다.

낡고 병든 경제에 대량의 IT 투자를 단기간에 유입시키고 벤처와 신경제에 대한 인식을 급속히 보급시킨 것이다.

그러나 벤처산업을 대소형의 불법대출.금융사고.주가조작.권력유착의 범죄가 빈발하는 도박장으로 만들고, 그로 인해 벤처도태자와 투자실패자를 양산하고, 낭패한 국민들로 하여금 벤처산업을 환멸하게 한 점은 보상할 길 없는 중대한 죄가 된다고 하겠다.

정현준.진승현류의 사건이 빈발하자 오늘의 실패적 상황의 책임을 벤처기업이나 벤처투자자의 도덕적 해이에 전가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기업은 단지 그 풍토의 산물일 뿐이다.

눈먼 돈이 난무하는 투기판에서는 정직한 기업도 재(財)의 시류(時流)를 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된다.

마치 벼랑 끝의 사자새끼처럼, 인색한 자금과 극렬한 경쟁이 있는 시장에서 건강한 기업이 자라는 것이다.

벤처든 굴뚝이든 이 원리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오늘의 벤처풍토조성의 가장 큰 책임자는 벤처정책이었다.

한국경제의 주제는 파악하지 못하고 욕심만을 앞세워 수 만개의 벤처기업을 ''지원육성''하겠다는 정책이 범 국민적 벤처환상을 일으킨 1차적 원인이 됐다.

농어촌 근대화를 추진한다며 무조건 자금을 풀어 수백만명의 농민을 빚더미에 앉게 한 전 정부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진정한 기술기반의 벤처를 생성하는 조건은 따뜻한 어머니 품이 아니라, 칼날같은 기술경쟁이 지배하는 시장이다.

벤처시장이 ''우리의 수준''을 찾아 조정되는 이 시기에, 산업정책당국이 또다시 ''지원과 육성''의 전가의 보도를 들고나오는 일이 없어야할 것이다.

kimyb@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