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회계법인 P회계사는 매년 2월이 되면 밤을 지새워 일한다.

12월말 결산법인의 감사보고서를 만들기 위해서다.

3월말 6월말 9월말 결산기업도 있지만 대부분 기업이 12월말이니 이맘때 쯤이면 일이 산더미처럼 쌓일 수 밖에 없다.

그동안 계속 감사를 해왔던 기업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처음으로 감사를 하게 되는 기업을 맡으면 회사가 제출한 재무제표는 물론 과거 감사보고서까지 일일이 뒤져야만 한다.

감사보고서 제출기한인 2월말(주주총회 1주일전)까지 모든 일을 마무리하기에는 벅찰 수 밖에 없다.

회사측이 재고조사를 할 때 입회를 하지만 모든 재고자산을 전부 조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엉터리 감사가 이뤄질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다.

12월말 결산 상장회사는 전체 상장사 7백3개(뮤추얼펀드 제외) 중에 81.5%인 5백73개(8월말 금융감독원 집계)나 된다.

코스닥등록법인중 12월말 결산법인의 비중은 88.8%에 달한다.

이러니 공인회계사는 2월이 최대성수기이자 "부실감사 대량생산"의 달이 되는 셈이다.

"대부분 기업이 결산월을 12월말로 잡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때문에 부외(부외)부채가 있는 지, 재고물량은 확실히 기재했는지 정확히 조사할 시간이 없습니다"(삼일회계법인 관계자) 기업의 결산담당자들은 "적정"의견을 내지 않으면 내년에 회계법인을 바꾸겠다고 반(반)협박조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지급이자가 지나치게 많다거나 퇴직급여충당금이 적게 계상된 것을 발견하더라도 과감히 "한정"의견을 내놓기도 힘들다.

감사인으로 선정되기 위해 노력했던 파트너(회계법인의 임원)의 입장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감사보고서에는 "적정""한정""의견거절""부적정"등 4단계로 감사의견이 명시된다.

기업이 의견거절이나 부적정 감사의견을 받으면 당장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된다.

한정의견을 받아도 주가가 하락하고 회계법인이 지적한 내용에 따라서는 자금조달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이유때문에 기업들은 감사인을 바꾸겠다며 회계법인에게 적정의견을 내달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감사의견을 "한정"으로 냈다는 이유 때문에 다음해에 감사인이 다른 곳으로 바뀐다면 회계법인으로선 수입원이 사라지게 된다.

회계법인이 기업의 압력에 약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지급이자가 지나치게 많아 회사가 돈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결국 이를 정확히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다음해의 감사인 선정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죠"(A회계법인 공인회계사) 지금은 문을 닫은 청운회계법인이 대우통신의 당기순익을 2백80억원이나 분식하면서 적자를 흑자로 만들어줬던 것도 계약연장을 의식한 때문이었다고 한 회계사는 들려준다.

이같은 일들이 보여주듯 회계법인이 엉터리 감사를 할 수 밖에 없는 데는 "감사보수"를 무기로 한 기업의 압력이 가장 크다.

그동안 공존공생의 관계를 유지해 온 것도 "적절한 감사보수"와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회계감사"의 딜(deal)에 따른 것이었다.

회계법인은 돈을 벌고, 기업은 돈을 빼돌리는 "누이좋고 매부좋은" 관계가 유지돼 온 셈이다.

회계법인 간의 감사인 선정 유치경쟁은 대단하다.

특히 대형 회계법인간에는 대기업을 상대로 감사보수를 받기 위한 로비전도 치열하다.

여기에 감사보수가 자율화돼 있어 회계법인으로선 보수를 싸게 받더라도 고객을 유치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국내 회계법인의 감사보수가 선진국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안진회계법인 관계자는 "감사보수가 지나치게 적다는 점도 원칙에 따른 감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런 환경이라면 공인회계사의 책임한계가 어디까지냐는 논란이 제기될 수 밖에 없다.

이에대해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공인회계사가 부외부채가 있는 지 적극적으로 조사할 권한과 책임은 없지만 재무제표를 보면서 부외거래 혐의를 발견하면 이를 조사하고 감사보고서에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의 압력을 이겨내고 공존공생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회계법인의 당면 과제이자 투명회계 정착의 전제조건이라는 이야기다.

최명수 기자 m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