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과 현대건설의 자금난이 불씨가 돼 대기업지배구조 문제가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대기업의 소유와 경영 미분리문제는 일찍부터 거론돼온 중요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과연 최근 현대그룹의 자금난 사태와 지배구조 문제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선 의문의 소지가 크다.

원인과 대책이 일치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다시 한번 따져 보아야 한다.

현대상선과 현대건설의 자금난 문제는 IMF사태 이후 관치금융을 불식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정부가 강력히 추진해온 증권자본주의로의 이행정책과 무관치 않다.

정부는 시장에 의한 기업감시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근거로 직접금융시장의 급진적 개방 및 육성책을 내놓았고,이를 배경으로 민간 자금은 그동안 은행권으로부터 단기금융시장과 증권시장으로 빠르게 이동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말 발생한 대우그룹 사태가 투신사태로 이어지고,또 최근 들어 새한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가자 민간자금은 수익성보다 안정성에 중점을 두면서 직접금융시장을 이탈,은행권으로 빠르게 환류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이 때문에 현대건설은 만기가 도래한 회사채의 차환발행이 어려워지게 됐고,삼성카드와 삼성캐피탈은 자체 자금조달이 어려움에 봉착하면서 현대상선에 대한 롤오버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은행권은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자금이 풍부해졌다.

하지만 대형화를 위해 통폐합이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비등한터라 현대에 대한 대출지원을 극히 꺼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순수하게 자금순환의 관점에서 바라본 최근 현대그룹 자금난 사태의 본질이다.

특성상 "한시적인 유동성 위기"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금 되새겨야 하는 것은 97년말 한국을 강타한 외환위기사태 역시 경제 펀더멘털과는 사실상 무관한 외화 유동성위기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과 IMF가 이를 한국의 체제개편을 시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포괄적 구조조정을 실시함으로써 우리 경제는 막대한 희생과 대가를 지불했다.

원인과 대책이 불일치했기에 빚어진 파탄이었다.

따라서 최근 현대의 자금난 사태를 두고 지배구조 문제로 몰고가는 정부의 태도에 대해 우려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총선참패 이후 권력의 누수를 우려한 나머지 정치적으로 상황을 왜곡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문제만 발생하면 한국의 재벌구조를 들먹이며 "원죄론"을 펴는 정부의 논지는 대단히 궁색하다.

현대그룹의 전근대적 지배구조와 투명성의 결여,승계구도를 둘러싼 2세들간의 경영권 다툼이 시장의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정부측 고위 당국자의 거듭된 발언은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가뜩이나 대내외적 여건 변화로 금융시장의 불안이 증폭된 가운데 오히려 정부가 나서서 극히 위험한 신뢰의 게임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심히 우려된다.

누군가 영향력있는 자가 무언가를 빌미로 잡고 늘어지면 시장의 군집적인 심리가 뒤따라 작동하는 것이 신뢰의 게임이 야기하는 자기충족적 위기발생의 메커니즘이 아니겠는가.

하반기 우리나라의 금융시장에는 수많은 지뢰밭이 놓여 있다.

투신사태 해결이 지체될 경우,또 2차 은행권 구조조정을 두고 논란이 거듭될 경우엔 특히 회사채 만기도래가 임박한 중견기업들은 심각한 자금난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경상무역수지가 전망치를 크게 밑돌기 시작했고,태국과 필리핀에서는 다시금 환율불안이 가중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외국자본들까지 정부가 주도하는 신뢰의 게임에 가담함으로써 금융시장의 불안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이제 원론적인 입장정리가 필요하다.

정부는 금융시장 안정책을 하루빨리 내놓아야 한다.

은행권과 투신권의 부실을 정리하기 위해 공적자금 투입이 불가피하다면 명분뿐인 시장경제의 원리를 접고,정치권과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한편 재벌지배구조의 문제에 대해선 우리경제의 장기적인 경쟁력확보라는 차원에서 별도로 접근해야 한다.

전문경영이 소유경영에 비해 무조건 우월하다는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

독일이나 일본의 경우 여전히 소유경영이 상당히 활발하다는 사실을 들어 소유경영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단지 소유경영은 장기적 전망의 측면에서 또 전략적 의지의 측면에서 장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되,소유경영에 내재한 도덕적 해이의 가능성,비합리적 확장의 타성을 통제할 수 있도록 경영투명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지배구조 개혁의 가닥을 잡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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