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뒤로도 그 자리에 몇 년째 그냥
서 있는
동네 뒷산의
등짝이 허옇게 벗겨진 상수리나무가
건너편 구릉을 치받아 오르다가 허리가 부러진
제 그림자를
본래의 자리로 불러들이느라
애를 먹고 있는
해 뜰 무렵

신용선(1945~) 시집 "하산하는 법"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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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뜰 무렵의 신비를 늙은 상수리나무에 의해서 재현하고자 한 시다.

그 상수리나무는 죽은지 여러 해 되고도 등짝이 허옇게 벗겨진 채 그 자리
에 서 있다.

해 뜰 무렵은 바로 그 상수리나무가 "건너편 구릉을 치받아 오르다가 허리
가 부러진/제 그림자를/본래의 자리로 불러들이느라/애를 먹고 있는" 때인
것이다.

가령 이 대목을 "모든 죽은 것들이 되살아나는 운운"으로 처리했다면
얼마나 싱거운 시가 되고 말았을까.

신경림 시인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