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 미국 MIT 교수 >

1990년대 세계경제의 화두는 단연 "세계화"였다.

아시아 금융위기 등 좋지 않은 사건들도 있었고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등(특히 중국에서는 엄청났다) 좋은 일들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상호 밀접한 관계속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르지만 국제무역과 해외투자 역시 급팽창하며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세계적인 추세가 됐다.

이같이 세계 통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가.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역사를 되돌아 보자.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사학자들은 운송.통신 분야의 신기술로 대규모 국제무역과 투자가 처음으로
이뤄진 19세기 중반 이후를 "제1의 세계경제"(First Global Economy)라고
부른다.

"세계경제"란 구상이 구체화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싹텄던 시기다.

당시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경제를 창출하기 위해 많은 전문가들이
동원됐었다.

이들은 대서양에 케이블을 설치하고 알프스산맥에 터널을 뚫는가 하면
바다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는 등 기적들을 일궈냈다.

그 중에서도 파나마 운하의 건설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파나마 운하가 완성될 즈음 세계경제는 오히려 붕괴되기 시작했다.

제1의 세계경제는 어떻게 보면 전쟁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파나마 운하의 완공과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공교롭게도 모두 1914년
8월에 이뤄졌다.

하지만 전쟁과 이로 인한 고인플레, 독일의 정치불안, 미국의 고립주의
등도 1945년 세계경제의 철저한 분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무역과 투자규모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지만 세계 경제주의
주창자들은 이미 1914년 이전부터 수세에 몰려있었다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이들은 전쟁 무용론, 국경 폐지론 등을 기반으로 한 세계경제주의를 계속
강조했지만 세계경제의 이념적 정치적 기반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초의 충격이 가해지자마자 붕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난 반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미국의 주도하에 재건된
"제2의 세계경제"시대에 살아오고 있다.

한 번 쓰러진 세계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계 전체의 생산 대비 무역 규모가 1914년 이전 수준에 도달한 것은
70년대 후반이었다.

"신흥시장"에 대한 선진국의 대규모 투자가 다시 이뤄지게 된 것도 최근
10년 사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제2의 세계경제는 예전에 비해서는 휠씬 튼튼히 다져진 기반 위에
세워져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고도 또는 아니라고도 대답할 수 있다.

튼튼하기는 하지만 충분할 정도로 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제2 세계경제시대에 접어들면서 시장참여자들은 상거래와 정복의 차이를
이전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무역은 더 이상 국내법에 한정되지 않고 재앙의 원인이었던 제국주의는
외면당하고 있다.

서방국가들도 지난 1914년의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었던 무력적인 민족주의
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간과하고 있는 한가지 사실이 있다.

제2의 세계경제도 제1의 세계경제와 마찬가지로 극히 소수에만 전파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경제라는 구상은 여전히 일반인들에게는 실감나지 않는 "뿌리없는"
세계경제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 또는 세계경제주의자 자신들을 위한 이론
쯤으로 치부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 있었던 시애틀의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시위대의
공격으로 결렬된 사태도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시애틀 WTO회담은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미국인들을 각성시킨 계기가
됐지만 시위대들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로인해 제3세계 노동자들은 고용기회를 박탈당할 수 있다는 사실은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제무역을 통해 상품과 서비스가 교류되는 한 일반인들은 세계경제주의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시애틀에서 확인됐다시피 대안이 없을 뿐이지 일반이들이 모두
세계경제주의를 선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21세기의 경제 이슈인 세계경제는 사실은 매우 "정치적"인 문제다.

즉, 제2의 세계경제라는 사안이 세계화의 선도조직인 스위스 "다보스 포럼"
에 매년 모이는 유명인사들의 범주를 뛰어넘어 일반인들로 부터도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실패한다면 제2의 세계경제도 결국 제1세계경제의 전철을 밟게 공산이
크다.

< 정리=고성연 기자 amazingk@ked.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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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폴 크루그만 MIT대 교수의 뉴욕타임스 기고문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