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을 열며] (3) 아름다운 새세기를 위해 .. 최종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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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률 < 예술의전당 사장 >
최근 한 대학 총학생회장에 여학생이 당선돼 화제가 됐다.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재미있는 대목을 하나 발견했다.
그 여학생이 앞으로 대학당국과 "아름다운 싸움"을 벌이겠다고 밝힌 것이다.
"싸움"앞에 "아름다운"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도 신기하지만 그 싸움이 장차
어떻게 전개될 지 관심을 끈다.
누가 봐도 "정말 아름다운 싸움이구나"란 평가를 받는다면 정치 경제 사회,
아니 모든 이해집단이 본받아야 할 "교본"으로 삼았으면 한다.
요즘 "아름답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아름다운 당신"은 어느 미장원 간판이고 "아름다운 사람들"은 한 항공사
직원들이 자칭하는 말이다.
서울 강남의 한 번화가엔 "아름다운 붕어빵" 행상도 등장했다.
한 지방자치단체는 "아름다운 화장실 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뒤집어 보면 우리들이 얼마나 "아름다움"에 굶주려 왔으면 그럴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기말의 그 지겹고 어두운 그림자가 걷히고 새로운 세기의 동이 트면서
사람들은 길고 긴 악몽에서 깨어난 듯 아름다움에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 우리는 가짜 아름다움의 허상에 홀려 뜬구름 같이 살아온 것은 아닐까.
덜 가진 것보다는 더 많이 가진 것이, 겸손한 것보다는 목에 힘을 주고 사는
것이, 낮은 목소리보다는 고함소리가 더 그럴 듯해 보이는 시대를 살아왔으니
말이다.
우리의 멋이 개성으로 평가받던 것은 이미 옛날 일이 됐다.
이제는 가격과 브랜드로 점수가 매겨지고 사람들의 넉넉하던 마음씨는
체면과 허세의 가면 속에 살벌해지고 말았다.
직장은 더 이상 어머니의 품같이 따뜻한 곳이 아니다.
교회와 사원은 많아도 그 어디서 신앙의 경건함과 순결함을 찾아야할 지
마음 둘 제단이 없다.
신과 아름다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주위에서 힘없고 버림받은 생명이 포옹하고 입맞추는 행위를 봐도 혹 위선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의심하기 십상이다.
빛나는 출세는 각고의 자기연마와 후덕한 인격, 미래를 투시하는 이지의
총합이기보다는 요령과 음해와 연줄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이런 세상을 두고 우리가 아름다운 삶의 환경 속에 살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목말라하는 "아름다움"은 어떤 것일까.
하늘의 무지개는 아님이 틀림없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발딛고 사는 땅위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 숨어있다.
귀청을 때리는 굉음에만 익숙해진 우리 귀에 들려오는 바흐나 베토벤의
웅장하고 균형 잡힌 선율이 그 것이다.
공연장의 기립박수와 환호, 미술관 앞에 길게 늘어선 관람객 행렬, 수려한
초목들로 둘러싸인 대학 캠퍼스와 도서관, 밤늦도록 어둠을 밀어낸 그곳의
불빛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따스해진다.
정치인들의 서사시와도 같은 연설과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유머, 아무리
일을 해도 즐겁기 만한 우리의 일터, 어느 날 생각지도 않았던 이웃으로부터
저녁초대를 받고 밤늦도록 담소하는 것도 아름다운 세상의 일상들이다.
불행히도 이런 일들은 아직 꿈에 가까운 얘기다.
하지만 상상만 해도 벌써 평화와 안식이 느껴진다.
누에가 뽕잎을 먹듯 푸성귀와 과일을 마음놓고 먹을 수 있는 즐거움, 흐르는
시냇물을 벌컥벌컥 들이킬 수 있을 정도의 청정한 자연, 집앞까지 타고 온
택시기사로부터 듣는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아름다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TV 노자" 강의에서 김용옥 교수는 칠판에 영어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크게 써놓은 적이 있다.
그는 곧 "기운생동"이 아름다움의 요체라고 자답했다.
AD 6세기 중국 남제시대의 화가 사혁의 말이다.
우아한 리듬, 심금의 울림 같은 것을 얘기하는 듯 했다.
아름다움의 시작은 감동에 있다는 뜻일 게다.
그후 6백년이 지나 서양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의 조건을 다음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완전함, 둘째는 적당한 비례와 조화, 셋째는 선명함.
글쎄, 그런 아름다움은 상상할 수는 있지만 어딘지 자로 잰 듯하고 수학공식
을 외우는 것 같아 숨이 막힌다.
차라리 나는 법정스님의 얘기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가득 찬 것보다는 조금 빈 것이 좋다.
희망이 이루어진 상태보다는 희망하고 있을 때가 좋다.
보고 싶다고 다 보는 것보다 하나 정도 남겨 놓는 것이 낫다.
충만한 것, 넘치는 것, 남보다 많은 것, 남보다 더 세고 위에 서는 것,
남의 것보다 비싼 것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얼굴과 마음엔 어느 구석에도
아름다움의 윤기가 없어 보인다.
새 해, 새 천년의 시작은 조금 비어있는 상태로 아름다움을 추구해보자.
그래야 진정 아름다운 사람일 테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4일자 ).
최근 한 대학 총학생회장에 여학생이 당선돼 화제가 됐다.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재미있는 대목을 하나 발견했다.
그 여학생이 앞으로 대학당국과 "아름다운 싸움"을 벌이겠다고 밝힌 것이다.
"싸움"앞에 "아름다운"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도 신기하지만 그 싸움이 장차
어떻게 전개될 지 관심을 끈다.
누가 봐도 "정말 아름다운 싸움이구나"란 평가를 받는다면 정치 경제 사회,
아니 모든 이해집단이 본받아야 할 "교본"으로 삼았으면 한다.
요즘 "아름답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아름다운 당신"은 어느 미장원 간판이고 "아름다운 사람들"은 한 항공사
직원들이 자칭하는 말이다.
서울 강남의 한 번화가엔 "아름다운 붕어빵" 행상도 등장했다.
한 지방자치단체는 "아름다운 화장실 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뒤집어 보면 우리들이 얼마나 "아름다움"에 굶주려 왔으면 그럴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기말의 그 지겹고 어두운 그림자가 걷히고 새로운 세기의 동이 트면서
사람들은 길고 긴 악몽에서 깨어난 듯 아름다움에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 우리는 가짜 아름다움의 허상에 홀려 뜬구름 같이 살아온 것은 아닐까.
덜 가진 것보다는 더 많이 가진 것이, 겸손한 것보다는 목에 힘을 주고 사는
것이, 낮은 목소리보다는 고함소리가 더 그럴 듯해 보이는 시대를 살아왔으니
말이다.
우리의 멋이 개성으로 평가받던 것은 이미 옛날 일이 됐다.
이제는 가격과 브랜드로 점수가 매겨지고 사람들의 넉넉하던 마음씨는
체면과 허세의 가면 속에 살벌해지고 말았다.
직장은 더 이상 어머니의 품같이 따뜻한 곳이 아니다.
교회와 사원은 많아도 그 어디서 신앙의 경건함과 순결함을 찾아야할 지
마음 둘 제단이 없다.
신과 아름다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주위에서 힘없고 버림받은 생명이 포옹하고 입맞추는 행위를 봐도 혹 위선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의심하기 십상이다.
빛나는 출세는 각고의 자기연마와 후덕한 인격, 미래를 투시하는 이지의
총합이기보다는 요령과 음해와 연줄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이런 세상을 두고 우리가 아름다운 삶의 환경 속에 살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목말라하는 "아름다움"은 어떤 것일까.
하늘의 무지개는 아님이 틀림없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발딛고 사는 땅위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 숨어있다.
귀청을 때리는 굉음에만 익숙해진 우리 귀에 들려오는 바흐나 베토벤의
웅장하고 균형 잡힌 선율이 그 것이다.
공연장의 기립박수와 환호, 미술관 앞에 길게 늘어선 관람객 행렬, 수려한
초목들로 둘러싸인 대학 캠퍼스와 도서관, 밤늦도록 어둠을 밀어낸 그곳의
불빛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따스해진다.
정치인들의 서사시와도 같은 연설과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유머, 아무리
일을 해도 즐겁기 만한 우리의 일터, 어느 날 생각지도 않았던 이웃으로부터
저녁초대를 받고 밤늦도록 담소하는 것도 아름다운 세상의 일상들이다.
불행히도 이런 일들은 아직 꿈에 가까운 얘기다.
하지만 상상만 해도 벌써 평화와 안식이 느껴진다.
누에가 뽕잎을 먹듯 푸성귀와 과일을 마음놓고 먹을 수 있는 즐거움, 흐르는
시냇물을 벌컥벌컥 들이킬 수 있을 정도의 청정한 자연, 집앞까지 타고 온
택시기사로부터 듣는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아름다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TV 노자" 강의에서 김용옥 교수는 칠판에 영어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크게 써놓은 적이 있다.
그는 곧 "기운생동"이 아름다움의 요체라고 자답했다.
AD 6세기 중국 남제시대의 화가 사혁의 말이다.
우아한 리듬, 심금의 울림 같은 것을 얘기하는 듯 했다.
아름다움의 시작은 감동에 있다는 뜻일 게다.
그후 6백년이 지나 서양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의 조건을 다음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완전함, 둘째는 적당한 비례와 조화, 셋째는 선명함.
글쎄, 그런 아름다움은 상상할 수는 있지만 어딘지 자로 잰 듯하고 수학공식
을 외우는 것 같아 숨이 막힌다.
차라리 나는 법정스님의 얘기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가득 찬 것보다는 조금 빈 것이 좋다.
희망이 이루어진 상태보다는 희망하고 있을 때가 좋다.
보고 싶다고 다 보는 것보다 하나 정도 남겨 놓는 것이 낫다.
충만한 것, 넘치는 것, 남보다 많은 것, 남보다 더 세고 위에 서는 것,
남의 것보다 비싼 것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얼굴과 마음엔 어느 구석에도
아름다움의 윤기가 없어 보인다.
새 해, 새 천년의 시작은 조금 비어있는 상태로 아름다움을 추구해보자.
그래야 진정 아름다운 사람일 테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