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옛날 원시인들은 "일한다"는 것과 "노는것"을 구분지어 생각하지
않았다.

일한다는 것이 "고달픔"으로 바뀌어간 것은 일과 놀이의 일치가 깨어지면서
부터였다.

불행하게도 일의 개념과 역사는 힘에 예속된 사람들이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요에 못이겨 할 수 밖에 없는 고통스런 행위로서 시작된다.

일의 어원을 캐 올라가 보면 "힘든 노력"과 "괴로운 짐" 등으로 나타나는
것도 그런데서 연유한다.

어찌됐든 인간은 일을 통해 자연을 개조하고 사회를 진보시키며 또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 배워나가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란 일의 역사"라든지 "일하는 인간(homo laborans)"이란
말도 생겼다.

자본주의의 정신적 토대를 구축한 프로테스탄트의 일에 대한 신학적 관점은
독특하다.

마르틴 루터는 일의 신과 인간을 위한 봉사, 소명에 의한 활동이라고 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 칼빈은 근면-저축-검약한 생활이 구원의 징표라는 일에 대한 적극적
교리를 전파시켰다.

서구에서는 이런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바탕이 돼 오늘날 처럼 자본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다.

일은 인간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고 자유를 빼앗아 가는 동시에 보람과
기쁨을 주는 쓰지만 달기도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진정 보람과 기쁨을 느껴야 일도 잘할 수 있다.

보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일에 대한 열정도 중요하다.

이같은 일의 본질적 속성은 산업구조가 완전히 변한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IMF사태 이후 직장이나 일의 중요성을 우리처럼 뼈저리게 느껴본 국민도
드물것이다.

상상을 초월한 혹심한 경제적 타격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요즘 우리는
지나치게 먹고 살기 위한 경제적 물질적 가치에서만 "일의 의미"를 찾는
극단적 사고에 빠져 있는 듯하다.

그것이 그대로 "삶의 의미"와 직결돼 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사회의 필요와 목적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긍심이
요즘처럼 필요한 때도 없을 듯 싶다.

일의 본래 의미는 그런 것이다.

정초에 일을 시작하면서 모두가 한번쯤 진지하게 다짐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아닌가 생각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