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기 < 연세대 교수 / 법학 >

나라의 기틀인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이 출범한 지 50년을 보내고 다시
새로운 반세기가 시작됐다.

아직 나이가 어린 신생국인 셈이다.

나라는 세웠지만 그동안 우리는 동족 사이에 처절한 전쟁을 경험했다.

두번에 걸친 군사 쿠데타도 겪었다.

그리고 나라 경제가 IMF 관리체제로 편입되는 불행한 상황도 맞았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제발전을 이룩한 영광의 기록도 있지만
너무나도 혹독한 시련과 좌절을 체험하면서 반세기 전환점을 돌아선 것이다.

시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인들은 새로운 국제환경의 변화 앞에서 적응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새로운 사고가 요구되는 사회, 법제도의 탈 국경화가 이루어지는 사회,
그리고 가장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퇴출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건국 이후 우리 사회는 독재와 민주라는 대립 구도 속에서 살아왔다.

흑백논리와 같은 단순구도 속에서 정치는 맴돌았고, 우리들의 사고방식
역시 여기에 길들여졌다.

그러나 건국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지난날의 패러다임으로는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새로운 한국사회를 향해 가볍게 떠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차별의식을 버려야 하고 특권과 독점을
청산해야 한다.

우리 사회를 부족국가와 신분사회 차별사회로 보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지역으로 나누고, 학벌로 차별하는 사회, 출신학교별로 줄서고, 낳기도
전부터 남녀 성차별을 하는 나라, 인종차별에 심지어 외모까지도 차별의
기준이 되는 사회를 그대로 둔 채 새로운 천년을 향해 떠날 수는 없다.

새 천년은 해묵은 껍질을 벗어던지고 가벼운 몸과 맑은 마음으로 맞아야 할
새 시대이기 때문이다.

제도적이고 관행적으로 보장되는 특권과 독점 역시 청산해야 할 과제이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온갖 독점적이고 특권적인 제도와 관행 탓에 한국
사회에는 공정한 경쟁규칙이 확립될 수 없었다.

대신에 극심한 기득권 지키기와 줄서기가 횡행했다.

공정한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가 미래예측이 가능하고 안정적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차별은 이처럼 특권과 독점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부패현상 역시 우리사회가 아직 제도화된 민주주의를 갖추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제도보다는 가지각색의 인연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에서 돈은 좋은
매개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패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보다 독점과 특권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와 관행을 찾아내 이를 없애는 작업이 선행돼야 함을 알아야 한다.

개혁의 대상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독점이익과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사라져야
건강한 사회가 된다.

반세기 전 한민족 동포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법은 당연히 좋은 것이고
민족의 염원을 실현시켜 줄 희망의 도구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이 얼마나 순진무구한 것인지는 역사를 통해 깨닫게
됐다.

사람들이 만드는 법이란 선악이 본래부터 정해지지 않은 양날의 칼과 같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공정한 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최소한
알게 됐다.

공정한 법을 통해 비로소 권력과 재산, 그리고 사회적 지위의 독점과 특권이
사라질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이 가치의 중심이 되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가장 중심적인
과제이다.

지금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 대부분의 가치 지표가 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소외되는 사회는 얼마나 잔인한 사회인가.

돈이 어린 생명보다 소중하다는 생각이 최근 발생한 화성 화재사건의 원인이
아닌가.

우리 모두가 이 땅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때 우리에
게 민주주의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시장경제의 발전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의 마음이 남지 않은 곳이라면 물론 대한민국의 제헌절은 지난날의
에피소드로 역사책 속에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제헌절의 참 의의를 싱싱하게 간직하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 skpark@ ellie.yonsei.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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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연세대 법학과
<>독일 괴팅겐대학 법학박사
<>미국 위스콘신대학 연구교수
<>논문:돈세탁 처벌에 관한 연구 등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