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연 칼럼] 누가 金사과를 키웠나
2006년 2월 시작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 가장 큰 반발에 부딪힌 분야는 영화와 농산물이었다. 각각 문화주권과 식량주권을 앞세운 영화인과 농민은 ‘영화와 쌀의 연대’를 선언하며 극렬 저지 투쟁을 벌였다. 결국 스크린쿼터가 대폭 축소되고 국내 주요 농산물은 예외품목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이후 결과는 다 아는 대로다. 곧 망한다던 영화산업은 지금 국경을 넘어 한류의 선봉에 선 반면 농업은 성장동력을 찾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3년 농업정책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농가 보호 수준은 세계적으로도 상위권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농업 지원 규모를 나타내는 ‘총 농업지원 추정치(TSE)’를 보면 한국은 1.6%로 OECD 평균인 0.6%의 3배에 가깝고, 주요 개발도상국을 포함해도 필리핀(2.3%), 중국(2%)에 이어 3위다. 농업 생산물의 시장가치 중 보조금, 관세 보호 등 정부 지원 몫을 반영하는 ‘농업생산자 지원 추정치(PSE)’는 46%로 OECD 평균(15%)의 3배가 넘는다. 그만큼 농업이 세금 지원에 의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 농업직불금을 비롯한 농업 지원 사업은 재정 보조금 206개, 조세 감면·면제 43개 등 249개에 이른다. 여기에 투입되는 예산만 연 16조원.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기료 등 숨은 지원까지 합하면 액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이 같은 과보호가 농업을 혁신 대신 관행에, 해외 대신 국내 시장에 고착시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상품 개발은 물론 생산·가공 기술과 물류·저장 인프라까지 다방면에서 경쟁력이 약해진 주원인이다. 비관세 장벽에만 기댄 탓에 수요 변화에 따른 생산량 조절 기능이 취약하고, 잦아지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시설도 미비해 과일·채소값 폭등은 연례행사가 돼 버렸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금사과는 이런 풍토에서 자라난 것이다. 여기에 ‘경자유전 원칙’을 바탕으로 한 규제가 켜켜이 쌓여 있어 민간이 창의성을 발휘해 부가가치를 높일 여지조차 없다. 젊은이들이 기회를 상실한 농촌을 떠나고 고령 농가만 남아 농촌이 황폐화하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도 이런 후과다.

농업은 가장 각광받는 미래 성장 산업 중 하나다. 스마트팜으로 대변되는 스마트농업이 확산하고, 한국의 강점인 정보통신기술(ICT)을 필두로 바이오, 나노 등 첨단기술과 융복합화하면서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고 있다. 1만 년 농업 역사 중 가장 큰 변화라는 평가가 나온다. 더구나 안전한 고품질 농식품 수요가 증가하는 14억 인구의 중국이 우리 농산물의 거대한 잠재 시장으로 뜨고 있다. 최근 불닭면 열풍에서 보듯 K컬처 인기가 K푸드로 옮겨붙는 마당에 K농산물 역시 세계로 나갈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과보호의 덫’에 빠진 한국 농업은 호기를 잡지 못한 채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늘상 좁은 국토 탓을 하지만 농토는 국경 밖에 널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거대 야당은 오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제2 양곡관리법’과 ‘농수산물 안정법’(농안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할 방침이다. 양곡법 개정안은 쌀값이 떨어지면 정부가 초과량을 의무적으로 사들이고, 농안법 개정안은 주요 농산물 기준 가격을 정해 이보다 내려가면 차액을 보전해주는 것이 골자다. 양곡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연간 3조원 이상, 농안법 개정안에는 고추, 마늘, 배추 등 5대 채소로만 추산해도 평년 기준으로 연간 1조2000억원이 소요된다. 막대한 재정 투입도 문제지만 혁신을 가로막는 건 더 큰 일이다. 이런 ‘농정 포퓰리즘’이야말로 우리 농업을 망치고, 농촌을 회생 불능 상태로 몰아넣는 자해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