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프 스티글리츠 < 세계은행 수석부총재 >


지난 97년 동남아에서 시작된 세계금융위기는 개발도상국의 정책실패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선진국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동안 선진국들은 외자유입 촉진과 금융산업 효율성을 내세워 개도국에
끊임없이 자본시장 개방을 요구해왔다.

그렇지만 정작 자본시장을 활짝 열어젖힌 개도국들은 선진국의 경제쇼크는
물론 미세한 정책변화에도 국내 금융시장이 이리저리 요동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테면 미국 경제가 기침만 해도 멕시코 경제는 곧바로 독감에 걸리는
지경이 됐다.

특히 동아시아의 금융위기는 시장개방 과정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단기
부채의 위험성을 새삼 부각시켰다.

과도한 단기부채는 결국 금융위기를 불렀고 경기침체를 심화시켰다.

개도국의 단기부채 급증은 리스크관리 의식이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이를
방치한 선진국의 잘못도 없지 않다.

개도국의 경우 자본시장을 개방하면 할수록 금융시장의 불안정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자본유출입과 외국은행설립 자유화 등 자본시장의 문을 열어젖힌 태국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은행들은 태국이 자본시장을 개방하자마자 신용위험 등을 따져보지도
않고 대출을 늘렸다.

일본의 장기적인 경기침체 여파로 일본 은행들이 태국 등 아시아로 눈을
돌린 것도 이유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일본 은행들이 부실화되면서 대출금을 회수하자 태국경제는 신용
경색에 직면했고 이는 금융위기의 불씨가 됐다.

바젤협약의 난맥상도 개도국의 금융위기에 일조했다.

국제결제은행(BIS)의 자산건전도 산정방식은 개도국이 단기차입비중을
늘리도록 유도했다.

현행 BIS기준에서는 은행의 위험가중치가 단기대출의 경우 대출액의 20%,
장기대출의 경우 1백%를 적용하도록 돼있다.

돈을 꾸어가는 개도국은 이자가 낮다는 이유로, 돈을 빌려주는 선진국
은행들은 위험가중치가 낮다는 이유로 단기차입과 단기대출에 매달렸다.

선진국 금융기관들이 무디스 S&P 등 국제신용평가기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도 개도국의 금융위기를 증폭시켰다.

신용평가기관이 개도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떨어뜨릴 때마다 연기금 펀드를
비롯한 선진 금융기관들이 일제히 금융자산을 처분, 위기를 가중시켰다.

선진국들은 그동안 끊임없이 개도국에 자본시장 자유화를 촉구하면서도
정작 그 부작용에 대해서는 거의 경고하지 않았다.

자본시장 개방은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높이고 금융기관을 시장리스크에
그대로 노출시킨다.

특히 개도국 금융기관들은 돈을 꾸어간 기업에 대한 정보가 빈약하고
리스크관리 능력마저 뒤떨어져 부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자본시장 개방에 앞서 효율적인 금융감독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개도국들은 자본시장 개방과정에서 금융감독시스템을
정비할 만큼 시간적으로 여유를 갖지 못했다.

개도국의 금융당국이 자본시장을 개방하면서 시장간섭 최소화라는 이유로
"자본 적정성" 감독에만 치중했던 것도 금융위기를 차단하지 못한 이유였다.

자본적정성 감독은 금융기관의 투기적인 자본운용을 억제하는 순기능이
있지만 역기능도 많다.

특히 신용을 바탕으로 한 금융거래관행이 정착되지 않은 개도국에서는
이같은 금융정책이 오히려 자본비용과 리스크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개도국의 금융위기는 선진국에서처럼 일부 금융기관의 부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총체적인 금융시스템의 붕괴 탓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당국의 역할은 신용경색을 최대한 막아 금융위기가
실물경제에 미치는 파장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산적정성 기준에 얽매인 경직된 금융정책은 사태를 더욱 악화
시켰다.

부동산 담보대출의 경우를 보면 이 점을 분명히 알수 있다.

경제가 하강국면에 접어들면서 땅값이 떨어져 담보가치가 낮아지자 기업
파산이 늘어났다.

부채상환을 위해 자산매각이 늘어났고 이는 담보가치를 더욱 떨어뜨렸다.

여기에다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도 자산건전성 기준을 유지하기 위해
담보물을 매각했고 이로인해 땅값이 더 하락하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자산적정성 감독기준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따라서 이번 세계 금융위기가 남긴 교훈은 크게 두가지다.

개도국의 자본시장 자유화는 철저한 사전준비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경제의 통합추세로 경제의 파급효과가 커지고 있어 이같은 노력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또 개도국에서는 금융체제 감독수단으로 선진국의 자본적정성 기준을
일률적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각국의 금융환경에 맞는 정책을 적절히
시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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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계은행의 조세프 스티글리츠 수석 부총재가 최근 시카고연방은
행에서 행한 "세계금융위기가 금융정책에 주는 교훈"이라는 주제의
연설문이다.

< 정리=박영태 국제부 기자 py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