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금년처럼 고통스럽게 보낸 해는 없었다.

70~80년대 오일쇼크 때 보다 더 어려웠다고들 한다.

초긴축과 고금리, 그에 따른 극심한 내수침체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외환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란 비난까지 들었다.

생산과 영업활동 보다는 "뼈를 깍는" 구조조정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모기업을 포함한 알짜기업까지 팔고 수십년간 길러온 엘리트사원을
내보냈다.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다시는 기아나 한보 같은 부실 대기업을 만들지 않겠다는 정부의 "훈수"도
계속됐다.

선단체제의 포기를 종용했다.

일부 중복.과잉투자업종은 그룹에서 떼내라고 주문했다.

현대 삼성 등 5대그룹은 12월 들어 계열사 절반을 줄이는 소그룹화의 길을
택했다.

6대 이하 대기업들은 전문업체화되는 과정에 있다.

"목숨 건 몸집 줄이기"가 재계의 올 화두였다.

<>5대 개혁 과제의 실천 =재계 구조조정의 방향은 일찌감치 정해졌다.

당선자 시절이던 지난 1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은 5대그룹 총수들과
기업구조조정 5개항에 합의했다.

<>상호지보해소 <>재무구조개선 <>주력업종 선정 및 사업구조조정
<>경영투명성 제고 <>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 강화 등이 골자였다.

5대그룹은 이 가운데 주력업종 선정 및 사업구조조정을 빼고는 가시적인
실적을 보였다.

상호지보해소의 경우 지난해 기준 26.1%였던 5대그룹 상호지보비율(자기자본
대비 보증비율)이 6월 18.1%를 거쳐 9월에는 14.6%로 떨어졌다.

재무구조의 척도인 부채비율은 작년말 4백38%이던 것이 올 연말에는
3백17%로 낮아질 전망이다.

외자유치도 올 들어 10개월 동안 1백42억달러의 실적을 올렸다.

내년(대우는 2000년)까지 세운 목표의 54.2%를 이미 넘어선 수치다.

경영투명성 제고 노력도 눈에 띄었다.

대부분 그룹이 선단식 경영을 조정자 역할을 해온 것으로 비난 받아온
기조실 회장실 등을 일찌감치 없앴다.

5대그룹 72개 상장회사는 올 주총에서 1백22명의 사외이사를 선임했다.

외감사의 경우도 58명을 뽑았다.

회장들은 각각 주력사의 대표이사로 등재해 권한과 책임을 함께 하기로
했다.

상반기가 끝날 무렵 정부 고위층에서도 주력업종 선정 및 사업구조조정
외에는 대부분 개혁이 이뤄졌다는 평가를 내놨다.

<>빅딜의 구체화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이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주력업종 선정과 사업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빅딜은 지난해말 새정부측 일각에서 제기됐지만 시장경제체제와 맞지 않는다
는 이유로 포기됐던 사안이었다.

6월10일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기업간 빅딜 발표설을 흘리면서
빅딜은 표면위로 부상했다.

현대 삼성 LG간 "3각 빅딜"설이 돌았다.

6월15일에는 5대그룹 55개 퇴출기업의 명단이 발표되는 등 정부의 압박
수위가 높아졌다.

재계는 7월4일 청와대에서 열린 김 대통령과 전경련 회장단 회의를 계기로
자율 빅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정부 각료와 5대그룹 회장간의 정.재계간담회라는 추진축도 만들었다.

산업자원부가 선별한 10대 과잉.중복투자 업종이 대상이었다.

전경련과 5대그룹은 9월초 항공 유화 철도 정유 발전설비 선박엔진 반도체
등 7개 업종의 사업구조조정계획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정유 항공 유화 철차 등은 통합준비를 서둘러 10월말 경영개선
계획을 주채권은행에 냈다.

그러나 정부는 "일괄타결"을 종용하며 시간을 끌다 11월23일 금감위 산하
사업구조조정위를 통해 일부 업종의 사업구조조정계획을 반려하고 새로운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김 대통령도 "구조조정의 미진"을 직접 질책했다.

5대그룹은 내키지는 않는 표정이었지만 주채권은행과 체결한 재무구조개선
약정 수정안에 강도높은 구조조정 의지를 담았다.

12월7일 김 대통령이 주재한 제5차 정.재계간담회에서 5대그룹은 계열사를
절반 가까이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 구조조정 추진에 합의했다.

<>재편되는 재계 =12.7일 청와대회동을 통해 정해진 5대그룹의 구조조정방향
은 독립기업 연합체다.

냉정히 말하면 상호지보 등 금전적 연결고리가 끊어진 소그룹이 되는
셈이다.

자산순위 1위의 현대그룹 등의 분류는 의미가 없어진다는 얘기다.

5대그룹은 3~5개의 주력업종만 육성하고 비주력의 경우는 타그룹과의
사업구조조정협상을 통해 분리하거나 매각 분사 등을 통해 정리하기로 했다.

주력인 경우도 부채비율이 과다하면 정부에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신청키로 했다.

6대 이하 그룹은 이미 전문화의 길을 걷고 있다.

부도가 나지 않은 그룹의 경우도 대부분 화의 워크아웃 신청 등 외부에
정리를 맡기고 있다.

지난달말 현재 64대 계열가운데 24개 계열 65개 기업과 중견기업 11개 등
76개 기업이 워크아웃에 선정돼 채권금융기관으로부터 수술을 받고 있다.

워크아웃을 신청한 그룹들은 10~20개인 계열사를 2~4개만 남기고 정리하고
있다.

<>새로운 과제 =모그룹 관계자는 "기업가 정신이 심각한 도전을 받은
1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이 경제위기의 책임이 있는 건 분명 사실이지만 대기업을
국민과 유리된 다른 집단으로 모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지적했다.

재계는 또 위험을 감수하며 모험적으로 투자한 것도 싸잡아 "팽창욕"으로
매도할 경우 대규모 사업을 벌일 기업인은 없어질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그룹을 소그룹화 시키면서 새로운 경쟁력을 갖출
신산업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는 점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선단식 경영이 없어진 자리에 투명한 경영이 들어설 것이다.

그러나 새롭게 세계시장을 겨냥할 산업이 없다면 그 경영을 써먹을 곳이
없어진다.

이미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재계가 신산업정책 논쟁에 불을 당겼다.

재계는 내년에는 이같은 실질적인 논의가 활발해져 확대지향적인
산업구조조정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 권영설 기자 yskw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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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 기업구조조정 일지 ]

<> 1.13 :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와 5대그룹 대표간에 대기업 구조개혁
5대원칙 합의

<> 2. 6 : 김 당선자와 30대그룹 회장간 구조조정추진 기본원칙 합의

<> 4.20 : 김 대통령과 경제6단체장 청와대 회동

<> 6.10 : 김중권 비서실장, "빠른 시일내 기업쪽에서 빅딜 발표할 것" 발언

<> 6.13 : 김 대통령, 5대그룹의 자발적 구조조정 촉구

<> 19 : 전경련 임시 회장단회의, ''기업자율 원칙아래 기업간 빅딜 적극
추진'' 결의

<> 7. 4 : 정부와 전경련 회장단 청와대 오찬간담회, 빅딜의 신속한 자율
추진 및 정부의 제도적 지원 등 9개항 합의

<> 26 : 1차 정.재계 정책간담회, 5대그룹 자율적 조기빅딜 합의

<> 8. 7 : 2차 정.재계간담회, 8월말까지 빅딜안 마련 합의

<> 9. 9 : 3차 정.재계간담회 개최, 7개 사업 구조조정업종 평가 및 향후

일정 협의

<> 22 : 정유업종, 경영개선계획서 주채권은행에 제출

<>10.22 : 4차 정.재계간담회, 12월까지 통합법인 출범 완료 합의

<> 31 : 석유화학 항공기 철도차량 등 경영개선계획서 제출

<>11. 5 : 5차 정.재계간담회

<> 23 : 사업구조조정추진위, 석유화학 철도차량 항공기 구조조정 계획안
1차 반려

<> 29 : 김 대통령과 김우중 대우회장 면담

<>12. 2 : 청와대, 삼성-대우 빅딜 협상 첫 공개

<> 4 : 5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 회의 구조조정 실천계획안 확정

<> 6 : 삼성-대우 빅딜 원칙 합의

<> 7 : 6차 정.재계간담회, 5대그룹 구조조정 추진 합의

<> 18~19 : 5대그룹 주채권은행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체결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