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욕을 딛고 투자유치 선봉에 >>

61년 11월 2일.

한두번 비행기를 타 본 것이 아니었지만 이날 투자유치단을 이끌고 미국으로
가는 이병철 한국경제인협회장(삼성창업주)의 감회는 남달랐다.

얼음같이 찬 이 회장은 이날따라 만감이 교차했다.

지난 몇달 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해 봄 심혈을 기울인 비료공장 건설계획이 "부정축재자" 시비 때문에
벽에 부딪히자 그는 일단 사업을 포기했다.

김영선 당시 재무장관의 주선으로 간신히 여권을 얻어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쿠데타가 일어나자 일본에서 머물 수도 없었다.

5.16 후 한달이 지난 6월 24일 그는 도쿄 데이고쿠호텔에서 AP UPI 등
외신기자들에게 "빈곤제거를 위해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틀후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 회장은 옆자리에 앉은 박준규의원
(현 국회의장)에게 "귀국하면 구속당할지 어떨지 한 번 점쳐보라"고 농담을
했다.

"한국 제일가는 재산가이니 구속은 당연하겠지요"라는게 박 의원의
대답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또 다른 국회의원은 "경제재건이 급한만큼 구속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이 회장 스스로도 앞날에 대해 종잡을 수 없었다.

수개월 사이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이 지내오다 이제 또 투자유치단장
자격으로 미국으로 날고 있는 것이다.

미국행 비행기에서 이 회장은 "지난 수개월동안 격랑도 심했지만 일도
많이 했다"고 자위하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어쨌든 박정희 최고회의의장과 대화채널을 만들었고
"정부보증" 등 외자도입에 대한 기본틀도 어느 정도 마련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 회장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쥐었다.

"경제발전 가닥은 잡았다. 이제 외자유치만 되면 된다"

이 회장 보다 6일 늦는 11월8일.

이번엔 구주(유럽)지역 외자교섭단이 출발했다.

단장은 이정림 대한양회 사장이었다.

유럽행 비행기에 오르는 이 사장의 회한도 이병철 회장 못지 않았다.

개풍계열의 총수인 이정림 사장은 이병철 회장과 대조적으로 매우
순박하고 다정다감한 이였다.

필자가 경제인협회회장(62~64년)으로 모시고 있을 때도 "부정축재"로
낙인찍힌 점에 대해 울분을 참지못해 가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이 사장이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뼈아프게 느낀 것은 "조상을 욕되게
했다"는 죄책감이었다.

경제인협회회장 시절 이 사장은 자기가 걸어온 길에 대해 본인에게 털어놓을
적이 있다.

그의 가문은 연안 이씨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이었다.

6대조에 이르러 사화에 휘말려 가문은 풍비박살이 났다.

이때 6대조는 유언이자 가훈으로 "이후론 일체 벼슬을 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벼슬을 하면 사화에 휘말리거나 부정부패에 휩싸여 패가망신할 것이란
설명이었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벌어서 가게를 꾸미도록 하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이후부터 이 사장의 조상들은 자손들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일하는 것만 배우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장 자신도 개성에서 보통학교(오늘의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곧 장사를 배웠다.

갖은 수모를 인내와 성실로써 이겨내는 "개성상인 정신"으로 이 사장은
6대조의 가훈을 철저히 지키도록 애써왔다.

회사도 크게 키웠다.

그런데 자기대에 이르러 "부정축재법"에 걸려 형무소에 갇히는 몸이 된
것이다.

자유당말기 강제적인 정치자금 거출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죄"였다.

이 사장은 "몸이 고달픈 것은 모두 참을 수 있고 재산몰수도 이겨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6대조부터 간직해온 가훈을 자기가 훼손시켜 조상을 대할 면목이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 사장이 구주유치단 인솔을 맡은 데는 조상을 욕되게한 오명을 자기
힘으로 벗기겠다는 뜻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앞서 경제인협회에서 기간산업건설을 분담할 때 그가 민간기업이
하기 어려운 제철사업을 맡겠다고 나선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미주투자유치단은 워싱턴에서 미 행정부와 기업인을 대상으로 외자유치
활동을 벌였다.

이병철 회장은 기업인들을 대상으로한 설명회에서 "앞으로 10년 동안
한국이 필요로 하는 투자액은 20억달러 정도로 이 가운데 13억달러는 외자로
충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가운데 10억달러는 세계은행이나 수출입은행의 공공 차관으로,
나머지 3억달러는 민간자본을 유치해 충당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곧바로 구체적인 도입계약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걸프 등 대기업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걸프는 뒤에 울산 정유공장에 큰 투자를 하게 된다.

구주투자유치단은 DEMAG, KRUPP, SIMENS 등 독일의 세계적 기업들과
구체적인 협의에 들어갈 수 있었다.

1년 사이에 2개의 큰 정변이 있었던 나라에 누가 차관을 줄 것인가.

유치단은 걱정도 많이 했다.

다행히 60년초 이병철 회장이 KRUPP 등과 벌인 비료공장 건설 교섭과 장면
정부 시절 태백산종합개발계획과 관련한 차관공여 교섭 등이 아직 살아있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외자유치 노력은 6개월이 지나지 않아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한국케이블과 금성사(구인회) 4백20만달러, 한일시멘트(허채경)
5백81만달러, 쌍용시멘트(홍재선) 6백95만달러 등을 포함해 독일에서만
2천5백만달러의 차관교섭에 성공했다.

정부가 파견한 교섭단(단장 정래혁 상공장관)도 이해 12월에 독일정부와
공공차관 발전설비 등 3천7백50만달러 차관협정을 체결(12월13일)했다.

외자도입에 의한 공업발전에 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