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경제협의회 창립 (상) ]]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언제 창립됐는가.

지금까지는 5.16쿠데타 직후인 61년 8월16일 한국경제인협회 창립일을
"생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보다 7개월여 소급해 이해 1월10일 한국경제협의회 창립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 사실에 부합된다.

경제협의회 창립 총회 당시 회원은 78명이었다.

이에 반해 군사정권의 권유에 의해 그해 7월17일 "경제재건촉진회"란
이름으로 만들어졌던 경제인협회는 회원이 13명에 불과했다.

한달여 뒤에 경제인협회로 이름을 바꿀 때도 회원은 30명밖에 안됐다.

특히 우리 경제발전을 단계별로 설명하려면 반드시 경제협의회를 전경련의
연원으로 삼아야 한다.

경제인협회를 기점으로 한다면 우리 경제발전의 밑뿌리나, 머리 부분을
잘라내는 격이 된다.

경제협의회는 5.16 군사쿠데타로 해산될 때까지 불과 4개월동안 활동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에 고도성장의 초석을 닦아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혼란한 시기에 재계를 결속시키는 구심점 역할도 했다.

그러면 당시 경제인들은 왜 협회를 만들어 활동하려고 했을까.

허정 과도정부가 정한 총선일인 7월29일이 가까워 오면서 민주당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야당에서 사실상 수권정당으로 변한 처지에서 민주당은 총선 입후보자
2백여명을 도울 선거자금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자유당 정부가 강권으로 정치자금을 조달한 것이 계속 문제되고
있었다.

음성적인 방법으론 정치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의지할 곳은 기업인들 뿐이었다.

그것도 "공개적인" 루트를 통해야 했다.

5월 하순께부터 민주당 관계자들과 재계 인사들간의 접촉이 잦아졌다.

민주당의 정치자금 출연 요구를 받게되자 기업인들은 행동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개별적으로 정치자금을 내는 것은 명분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6월초 약 50여명의 기업인이 서울 시내 모처에서 회동했다.

이날의 결론은 첫째 재계가 정재를 거출해 총선을 깨끗하게 치를 수 있도록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둘째 민주당에 신.구파 분쟁을 조속히 끝내고 화합단결해 줄 것을 제의키로
했다.

이들은 민주당과 접촉해 기업인들이 정치자금 2억원을 모아 기탁키로 하고
대신 경제정책에 경제계의 의견을 십분 반영할 것을 약속받는다.

결국 7.29총선을 통해 민주당은 집권여당이 됐다.

정치자금 거출 등으로 기업인들이 함께 할 일이 많아지자 이한원 대한제분
사장 등 소장경제인들은 일본의 경제동우회를 모델삼아 경영이념단체를
만드는 구상을 했다.

이들은 재계의 중심이라할 경방 김용완 사장 화신 박흥식 사장 등과
접촉하면서 경제단체설립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미 김용완 사장은 천우사 전택보 사장 대한상의 송대순 회장 등과
총선에서 정계에 진출한 김용주 전용순 의원(전 상의회장)과 공업발전을
선도할 경제단체 설립에 대해 의견을 조율하고 있었다.

가을이 지나 12월 들어 창립준비에 가속이 붙었다.

3일 반도호텔에서 50여명이 참석해 임시간사회를 열고 7인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어 20일에는 상의회의실에서 준비위원회를 갖고 취지문 정관초안을
만들었다.

초대회장으로 김연수 삼양사회장을 추대하는 방안도 협의했다.

경제협의회의 창립총회는 해를 넘겨 61년 1월10일 열렸다.

이날 오후 2시 반도호텔 대회의실에는 당시 내로라하는 주요기업체 대표
78명이 모였다.

장면 총리까지 참석해 축사를 할 정도로 거창한 행사였다.

그러나 창립총회는 했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회장 선임이 벽에 부딪친 것이다.

회장으로 추대된 김연수 삼양사회장이 절대로 취임치 않겠다고 버티고 나선
것이다.

당시 창립준비위원들의 목표는 이 단체를 재계를 상징할 수 있는 강력하고
민주적인 모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럴려면 덕망있는 회장을 모셔야 했다.

우선 정계나 관계출신이 아닌 순수 민간기업인이어야 했다.

또 덕망과 경륜이 탁월해 재계는 물론 각계의 숭앙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더구나 자유당 정권 때 본의든 타의든 여론에 오르내린 인물은 피해야 했다.

당시 재계에선 김연수 회장이 최적임자였다.

총회 직후 준비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추대했다는 사실을 전했을 때 수당
(김연수 회장의 아호)은 완곡히 거절했다.

김회장은 "나는 인생관이 앞에 나서기보다는 남이 안보는 뒤에서 말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음날에는 김회장과 막역한 친지를 보냈다.

그래도 별무소용이었다.

"더 좋은 분들이 많다"는 대답만 듣고 돌아왔다.

셋째날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려갔다.

형식은 권고였지만 "압력"에 가까웠다.

한 인사는 "지금 심각한 정치 경제적 혼란으로 국가운명이 파탄지경에
있다"며 "이럴 때 수당만 빠져있다면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준비위원들도 "경제인들이 사심을 버리고 대동단결해 산업을 개발해
민생을 안정시키자는 대의에서 뭉쳤는데 왜 빠지려 하느냐"며 거들었다.

김회장은 체념한 듯 "하루만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이사회에서 회장으로 공식 추대됐다.

실로 삼고초려였던 셈이다.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