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원년(1451) 5월 7일에도 집현전 직전 하위지는 경연에 검토관으로
나가서 "대학연의"를 강하다가 백성에게 정치의 혜택을 입히는 방법을
묻는 임금에게, 용역을 덜어주고 의장의 기능을 원활하게 하며 공납의
폐해를 없애고 적임자를 지방수령으로 발령하는 일 등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10월 24일 문종이 "병요"를 친히 편찬하면서 그 원고의 교정을
대신들에게 부탁하니 좌찬성 김종서가 하위지에게 맡길 것을 청하였다.

이에 문종은 하위지를 인견하고 그 일을 맡겨 완성하게 한다.

김종서의 의견을 많이 채택하고 수양대군이 이 일을 관장하였다.

문종 2년(1452)은 하위지가 36세 되는 해인데 2월 6일 일본 사신 선위사가
되어 이들을 영접하기 위해 경상도로 떠나게 되자 문종은 하위지를 인견하고
이렇게 말한다.

"이웃나라와 사귀는 것은 큰 일이다. 틈이 생기기 쉬우니 이웃나라 사신을
대우하는데 반드시 후하게 하며 정직해야 한다. 위에서는 매번 더 후하게
하고자 하나 맡은 관청에서 항상 억제하니 뒷날 폐해가 생길까 무섭다.
만약 후일의 폐해가 되는 일이 생긴다면 진실로 곤란하게 되니 무릇
여러가지 공급하고 대우하는 것을 힘써 반드시 후한데 따르도록 하라"

하위지의 성품이 융통성이 없을 정도로 강직한 것을 알기 때문에 문종은
이런 당부를 하였던 것이다.

일본 사신은 세종대왕의 조문을 위해 파견된 조문사였는데 하위지의 안내를
받아 서울에 당도한 다음 5월 6일 세종대왕의 혼전에 배례하면서 국왕을
먼저 배알하겠다고 하다가 하위지에게 제지당한다.

그런데 5월 14일 문종이 겨우 39세의 나이로 갑자기 돌아간다.

하위지는 자신의 순직한 성품을 높이 평가하면서 극진히 아껴주던 문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지만 문종이 자신에게 맡겼었던
일본 조문사의 접대일을 소홀히 할 수 없어 그 감호와 호송의 책임을 다하게
되니 윤 9월 14일에는 이들을 이끌고 경상도 웅천까지 내려가 선위하고 10월
15일에는 일본 조문사정사 정천이 대장경의 빠진 부분 1백13권을 채워
달라는 요청을 예조에 아뢰어 보충해 주도록 노력한다.

단종 원년(1453) 계유는 하위지가 37세되는 해이다.

이해 3월 15일에 하위지는 집의(종3품)가 되어 다시 사헌부로 들어간다.

지난 2월 10일 비로 문종 현릉의 사토가 물러난 일을 가지고 사헌부에서
산릉도감 제조를 맡았던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 등을
공격하다가 사헌부 관원 전원이 모두 파면당했기 때문이다.

이날 기건(?~1460)이 대사헌이 되고 유규(1401~73)와 조계팽이 장령,
유성원이 지평이 되었다.

이때 김종서의 장자인 김승규가 중훈대부(종3품)로 승진하여 전농윤이 되고
황보인의 장자인 황보석은 조산대부(종4품)로 승진하여 사복소윤이 되었는데
이는 이조판서 허후가 두 재상의 뜻에 아부하기 위해 승진시킨 것이라고
"단종실록"에는 기록되고 있다.

사실 김승규와 황보석은 수양대군이 고부사를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면서
이들 두 사람을 인질로 수행시켜 데려갔다 왔으므로 그 공로에 의해 승진이
있었던 것이다.

4월 20일에는 성삼문을 다시 사헌부 집의로 발령하여 하위지와 함께 근무
하도록 하며 하위지 등 10여인에게 "병요"를 수찬한 공으로 한 자급씩
품계를 더 올려 주는데 이는 수양대군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하위지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은 이것이 수양의 회유책인
것을 간파하고 그 다음 날인 4월 21일에 즉각 지평 유성원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리게 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한다.

"수양대군의 종사관은 조금도 상줄 만한 공이 없고 조충손(조췌손)이
안평대군을 구료한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바인데 아울러 품계를 더한 것은
심히 옳지 않습니다. 성삼문 하위지 이개 등에게 "병요"를 수찬한 공으로
각각 한 자급씩을 올려 주었는데, 이 역시 작은 일이니 벼슬로 상줄 필요는
없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고쳐 바로잡으십시오"

그러나 어린 임금은 이것이 대신과 의논해서 한 일이니 고칠 수 없다고
말할 뿐이다.

이에 다음 날인 6월 22일에는 당사자인 하위지가 나서서 그 명령을 받들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아뢴다.

""병요" "병서(병서)"를 수찬한 사람들에게 모두 가자(품계를 더해줌)
하라고 명하니 신도 역시 더불어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이 책에서
진실로 상받을 만한 공이 없습니다. 집현전은 본래 책을 만드는 곳이고 고열
하는 것은 바로 그 직분입니다. 가만히 듣건대 수양대군이 가자하도록 의논
하여 아뢰었다 합니다. 대저 상작은 국가의 공기라 가볍게 베풀 수 없거늘
하물며 "일체 사사로운 일은 아뢸 수 없다"는 교지가 있었음에도 종실이
이를 계속 아뢰어서 사사로운 은혜를 팔려하니 심히 부당합니다. 청컨대 이
명령을 거두십시오"

단종은 이렇게 전지한다.

"이 책은 바로 문종께서 친히 지으신 책이니 참여하여 모신 사람은 그 공을
상줄만 하고 또 글자를 베껴 쓴 사람도 역시 이미 가자한 까닭에 대신과
더불어 상의하여 주었을 뿐이다"

하위지는 다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비록 전례가 있다 하지만 종실이 사사로이 아룀으로 인연해서 가자하는
것은 편편치 못하니 신이 벼슬에 나가는 것은 의리상 불가합니다. 반드시
고치기를 청합니다"

이를 윤허하지 않자 하위지는 물러나서 다시 이런 장문의 상소를 올린다.

"이달 20일에 신으로 중직대부(종3품)를 삼는다고 하비하심에 그 사유를
알지 못하다가 이어 들으니 수양대군이 "병요"의 공을 논하여 아뢴 바에
인연하였다 함에 두렵고 놀라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생각컨대 그때 "병요"에 종사한 자들은 모두 기록할만한 공이
없으며 신은 더욱 공로가 없는데 또 종친의 아룀으로 인연해서 외람되게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니 의리에 크게 옳지 않습니다.

신이 이런 뜻을 가지고 내린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빌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니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작명은 국가의 공기이며 임금의 대권입니다.

공기인 까닭으로 임금도 가볍게 베풀 수 없고 큰 권한인 까닭에 신하는
감히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 엄하기를 이와같이 하여 백성은 방비하여도 오히려 좌우로 인연을 대서
사문이 저자와 같다는 탄식이 있거늘, 하물며 아래에서 가볍게 의논하나
금하지 않고 위에서 가볍게 베풀어 무겁게 하지 않아 먼저 그 방비함을
제거한다면 폐해가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세종대왕은 일찍이 작명을 중시하여 비록 한 자급일지라도 가볍게 주지
않았으니 제조관이 낭청을 천거해 쓰는 데서도 오히려 금방이 있었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권한이 아랫사람에게 옮겨갈까 두려워한 것으로 그것은
후세를 위하여 멀리 생각하신 것이었습니다.

또 인재를 천거해 올리는 것은 대신의 직책입니다만 옛날의 어진 대신은
오히려 그 사람이 천거했다는 사실을 알까 두려워 하였으니 그 은혜가
자기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할까 무서워서였습니다.

하물며 종실의 어른으로 감히 이와같이 행동하여 공공연히 천거해 올린다면
은혜가 누구에게서 나온다고 하고자 해서 이겠습니까?

종실이 처신하는 도리에서 크게 어그러졌습니다.

요즈음 자급을 더한 사람에는 경연에서 시종한 사람이 많으니 신과 같이
형편없는 사람도 역시 대간에 시종하는 벼슬에 참여하여 사사로이 종친에게
지우를 받았습니다.

진실로 대체를 이지러뜨렸는데 하물며 대헌의 규탄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모른척하고 벼슬에 나아간다면 더욱 옳지 않은 것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스스로는 아깝지 않다 하더라도 이에 조정을 욕보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성상의 하교에서 비록 이르기를 이미 대신과 의논하였다 하지만 일에 옳지
않음이나 마땅치 않음이 있다면 대신이 더불어 아는 바라도 서둘러 고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성상의 하교에 비록 이르시기를 그 직책에 나가라 하지만 그러나 사체가
이와 같으니 신은 의리상 성지를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은 살피고 유의하여 확연히 굳건한 용단을 내려 즉시
내린 명령을 거두십시오.

그래서 공도를 밝히고 공선을 엄히 하여 요행을 바라는 문호를 막아
버리십시오"

수양대군의 의표를 찌르는 이 상소문이 올려지자 수양은 하위지를 포섭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하위지를 두려워하며 기피하게 된다.

단종은 4월 24일 이 상소문을 의정부 사인 나홍서를 불러 전해주며 의정부
에서 의논해 아뢰라 하니 의정부에서는 고칠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수양도 이를 변명함에 하위지는 종친이 아뢰어 가자를 받았으니 사헌부
관원으로 뻔뻔하게 벼슬에 나갈 수가 없다는 내용의 사직소를 올리며
이어서 이렇게 아뢴다.

"헌부는 본래 규탄하는 곳이니 제 몸이 바른 연후에야 가히 남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종친의 아룀으로 부당한 벼슬을 받았으니 신이 비록 죄를
받는다 해도 벼슬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