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정말 우리의 혈맹입니까"

지난 2일 오후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가 합의한 양해각서 내용이 발표된
직후 재계는 비통함과 함께 배신당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협상 전과정에서 미국이 깊숙히 개입해 왔다는 소문에 반신반의했던
기업인들이 협상결과를 전해 들으면서 엄연한 사실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 조기축소, 회계제도 변경, 기업부채비율 축소등
전례없이 민간기업들에 대한 요구조건들이 여기저기 포함돼 있었다.

여기에 미국이 틈만나면 요구해온 자본시장의 개방확대는 물론이고 미국
자동차의 무차별적 국내상륙을 저지해온 수입형식승인제도도 고쳐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한마디로 미국이 고성장을 이끈 우리의 특수한 기업구조를 이번 기회를
이용해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철저히 관철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재계에서는 보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이 그렇게까지 할지는 몰랐다"는 반응이다.

모그룹 기조실 임원은 "그동안 금융위기를 겪었던 외국의 경우 그 배경에
미국이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며 "이제 일부 산업에서 경쟁자
수준으로 큰 우리를 타켓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설득력을 더해 주고 있는 것은 미국 언론에서조차 제기하고 있는
미국의 음모설.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지는 "미국이 한국에 대한 영향력행사를 위해
한국이 일본 등 역내국들로부터 차입하려던 계획을 차단하고 IMF의 구제금융
을 신청토록 유도했다"고 폭로했으며 타임지는 "IMF가 한국경제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고 요구조건을 강화하고 있다"고 문제제기를 했다.

또 미국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일시적 금융위기를 치유하기 위해 고도
성장에 적합하게 구축된 한국경제구조 전반을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재계는 이같은 미국 음모에 대응할만한 굳건한 경제기반을 갖추지 못한
스스로에 자탄하면서도 미국을 맹방으로 여겨온 것에 대해 허탈해하고 있다.

그동안 학생이나 노동자계층에서나 나오던 반미감정.

이젠 재계에서 그 반미감정이 움트고 있다.

김철수 < 산업1부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