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중순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일주일에 3~4일은 한보철강 어음이 교환돌아왔는데 그 때마다 거의 매번
연장이 걸렸다.

12시가 넘은 적도 두번 있었다"(보람은행 삼성동지점 김종순 대리)

교환에 부쳐진 금액은 보통 몇십억원 단위였고 1백억원을 웃돈 날도 있었다.

어음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한보철강 사람들은 대단한 재주꾼이었다.

규모도 규모였지만 어떻든 급전을 구해왔다.

그러나 벼랑으로 내 몰리면서 한보 사람들은 점차 필사적으로 되어갔다.

96년 11월21일.

손홍균 전 서울은행장이 검찰로 소환되던 시점이었다.

손행장은 구속되기 직전 정.관계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구명운동을 벌여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손행장은 그 경황없는 틈에도 1백억원대의 거액여신에 사인을 했다.

한보철강에 대한 지급보증이었다.

당초엔 2백억원으로 예정돼 있었지만 일선 부장들의 반발이 커 규모가
축소됐다.

그런데 더 웃기는건 다름 아닌 담보.

1백억원 지급보증에 대한 담보는 놀랍게도 철근 3만t.

싯가로 90억원어치였다.

부지나 건물을 담보로 잡는 경우야 허다한 일이지만 철근 담보는 상식밖의
일이었다.

담보에서 모자라는 부분은 부산제철 공장부지가 주택공사에 수용되면서
받을 대금으로 벌충한다는 조건하에서였다.

어쨌든 손행장의 구속과 함께 1백억원은 금고속을 빠져나갔다.

11월29일.

1백억원이후 열흘도 지나지 않았는데 한보철강은 다시 서울은행에서
2백90억원을 빌려갔다.

부산공장 부지에다 제일은행 당좌수표까지 내놓으며 한달짜리 자금을
끌어갔다.

손행장과 정총회장 사이에 어떤 말못할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어떻든 그나마 11월까지는 괜찮았다.

12월이 되면서 위기는 본격화됐다.

"지난해 3월부터였다.

한보철강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시설자금 어음만기를 월초로 고정시켰다"
(제일은행 어수억 섬유센터지점장)

그 때부터 시작된 "마의 화요일"은 연말이 되면서 한보철강을 바람앞에
촛불처럼 만들어갔다.

11월5일(화)의 9백50억원을 비롯해 12월3일 9백억원(화) 97년 1월8일
1천2백64억원(수) 2월4일 6백4억원(화) 3월4일 6백60억원(화) 등이 줄줄이
다가왔다.

줄잡아서 4천억원.

돌아오는 어음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종말을 향해 숨가쁘게 내달렸다.

"12월들어선 물대(물품대금)보다도 금융권 어음이 많이 돌아왔다.

무작정 지원해줄 수만은 없었지만 어음을 막아주지 않으면 그자리에서
부도가 나는 상황이었다"(어지점장)

소위 말하는 "괴어음"들이 돌아왔다.

괴어음은 정총회장이 자금을 빼돌리기 위해 남발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은행들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제일은행이 먼저 총대를 멨다.

12월15일부터 계속 긴급대를 풀었다.

하루에도 수십건이 돌아오는 "잔챙이" 어음을 막기 위해 어쩔수 없었다.

1월초까지 6백33억원.

한일은행도 동참했다.

코가 꿰인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당좌거래가 있다는 원죄로 인해
줄줄이 말려들었다.

"주거래은행이 부도를 내지 않는데...

워낙 규모가 큰 기업이어서 함부로 부도내기가 어려웠다"
(한일은행 융자부 관계자)

상업은행도 거들어줬다.

피크는 역시 1월8일이었다.

4개 은행장들이 협조융자형식으로 모두 1천2백억원을 지원키로 한 것.

당초 분담비율은 외환 6 산업 3 제일 2 조흥 1로 돼있었다.

그러나 그 때를 기점으로 채권은행단 사이에서도 균열이 본격화됐다.

외환은 6백억원중 4백50억원을 내놨다.

임원들이 1백억원을 깎은데다 50억원의 미납이자를 뗀 채 줬다.

조흥은행도 44억원만을 던져놓고 팔짱을 꼈다.

그것도 8일이 아닌 9일.

"열연공장에 대해 근저당권 설정등기를 하려했는데 관할법원이 해주질
않았다.

이유는 "건물이 등기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조흥은행 이대수 영업부장)

결국 제일은행이 6백30억원을 뒤집어썼다.

말이 좋아 협조융자였지 실상은 비협조융자였다.

행장은 행장들대로 임원은 임원들대로 들끓는 논쟁과 갈등속에서 한달여를
보냈다.

한보철강의 운명은 가파르게 추락했다.

정총회장은 1월10일 세양선박(97만7천주) 상아제약(39만7천주) 주식을
서울은행에 맡기고 87억원을 염출했다.

만기 4일짜리.

이제까지 은행권에서 빌린 자금중 최단기자금이었다.

1월13일부터 20일까진 제일은행이 2백50억원의 물품대금을 갚아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1월21일 저녁 6시.

보람은행 김대리는 부도대전을 끊고 있었다.

"부도사유 : 예금부족..."

평소 돈달라고 그렇게 조르던 한보철강 자금부 사람들은 이날 오후내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 이성태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