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생활은 말로써 하는 자기 표현의 연속이다.

가정에서 가족들과의 관계가 그렇고 어디를 가도 자기 표현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살다 보면 말의 홍수속에서 정작 자신의 말을 잊고 지낼 때가 있는가
하면 내키지 않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게 부딪친다.

말을 능수능란하게 하는 것은 배우의 중요한 요건이다.

물론 이것은 무대위에 국한된 얘기다.

작품에 나오는 인물의 캐릭터를 연기를 통해 살아있는 인물로 창조해 내는
것이 배우의 일이라면 그 90%는 말로써 이뤄진다.

활자화된 대사를 통해 제3의 인물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배우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일정한 나이가 되면 나름대로 자기표현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교육과정을 거치듯이 배우가 무대에 설수 있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기훈련을 쌓아야 하는데 그중 말에 관한 훈련이 주종을 이룬다.

어떤 분야에서건 일가를 이룬다면 더이상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배우의 경우는 다르다.

아무리 훌륭한 배우라도 한 작품을 소화하기까지는 맡은 배역에 접근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연습해야 한다.

무대위에 올려지는 것은 바로 연습과정의 결과일 뿐이며 연습 그 자체가
승패를 좌우한다.

무대위에서 배우가 토해내는 말은 하나의 생생한 인물로 전환돼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때로는 웃음을 터뜨리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관객들은 모두가 꾸며진 얘기임을 알면서도 순간순간 감명을 받게 된다.

이 모두가 배우가 창조한 인물이 관객들에게 또다른 진실로 전해져 신뢰
받기 때문이다.

"연극은 픽션이다"라는 앞선 판단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면 연극은
성립될 수 없다.

관객들은 배우의 연기를 진실로 착각하고 배우의 한마디 한마디에 의미를
찾고자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바로 무대와 객석 사이에 신뢰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무대에 옮겨 놓는다면 그것이 보다 확실한
진실로 보여지지 않겠는가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연극에 등장하는 의사역을 실제의 노련한 의사를 등장시켰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틀림없이 실패한 무대가 돼 버린다.

우리는 흔히 일상생활에서 "연기를 잘한다"거나 "연극을 한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 말은 진실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또다른 표현이다.

연기는 무대위에서 배우만 해야 하는 것이다.

배우를 빰치는 연극을 한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생활은 신뢰할 수 없는
불신의 사회가 될 것이다.

하루를 보내면서 듣게 되는 그 수많은 말들의 진위를 가려내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면 우리네 생활이 얼마나 피곤할 것인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무대위에서 빛나고 배우로서 그 몫을 다하는 것이다.

현실의 무대에서는 연기가 아닌 진실된 말, 신뢰할 수 있는 말이 통하는
세상이 돼야 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배우가 아닌 사람이 명배우 뺨치는 연기를 구사하는 것을
많이 봐 왔다.

그러나 그러한 연기의 진위는 관객들이 먼저 알아차린다.

왜냐하면 진실이 결여된 연기는 어설프게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대위에는 무대만의 진실이 있듯이 진실한 연기만이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연기는 배우의 몫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