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균 < 증권부장 >

"주가를 올리기 위해 일한다"

몇해전 미국 휴렛팩커드 본사에서 그곳 직원에게 들은 말이다.

노동법개정안의 기습처리와 파업사태로 주가가 연중 최저치에 육박한
한국증시를 보면서 문득 이 말이 생각난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휴렛 팩커드 본사엔 사무실 입구에 주가전광판이
달려있다.

전광판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이 회사의 주가가 나타난다.

출퇴근할 때마다 직원들은 자기회사 주가를 쳐다보는 것이다.

사무실입구에 달아놓은 주가 전광판은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이해가 안가는
일이다.

신문의 주식시세면을 펴볼라치면 "일은 안하고 주식투자자 하느냐"는
주위의 핀잔이 날아오는 판에 전광판은 어림없는 일일게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엔 다르다.

직원들이 대부분 주식을 갖고 있다.

게다가 보너스도 주식으로 받는 경우가 많다.

주식수가 적지 않은 것이다.

주가 움직임에 따라 퇴직금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이쯤되면 주가를 위해 일한다는 말이 전혀 엉뚱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회사측이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서도 주가를 적정수준이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

주가가 너무 떨어지면 직원들의 사기가 크게 꺽이는 탓이다.

회사측이 주식투자자들에게 회사의 경영실적을 일일이 설명해가면서
투자를 권유하게 돼 있다.

주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돼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휴렛팩커드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의 주요 기업들의 경우가 거의 다 그렇다.

이른바 첨단업종일수록 두드러진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게이츠회장도 직원들에게 주식을 나눠주면서 회사를
키워냈다.

회사 실적이 좋아지면 주가가 오르고 직원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는
선순환구조가 작용한 것이다.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일본 소프트뱅크사 손정의 사장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직원들과 주식을 나눔으로써 직원들의 결정적인 도움을 얻어낼 수 있었다.

영국의 대처 전총리가 주창한 대중참가 자본주의(Popular Capitalism)도
궤를 같이한다고 볼수 있다.

경영인과 사원이 일치단결해 기업발전을 이끌어 가려면 국민들이 주주가
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국내에도 이런 기업들이 하나둘씩 눈에 띈다.

첨단업종의 벤처기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런 이런 추세를 내몰라라 하는 기업이 훨씬 더 많다.

내가 창업한 회사를 누가 뭐라고 하느냐는 식의 경영관이 지배적이다.

전자의 경우가 주주와 주가를 중시하는 기업이라면 후자는 그 반대이다.

하기야 자본주의식 기업치고 주주를 경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주는 문자그대로 기업의 주인이다.

주주들이 뭉치면 이사 등 경영진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에 있어서는 지금까지는 예외였다.

기업은 주주들에게 가능한한 적게 배당하고 기업의 성장을 위해
재투자하는게 정상이었다.

많은 기업인들은 아마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주주들에게 배당을 하느니 차라리 비용으로 써버리는게 낫다고 생각하는
경영진들이 많다.

물론 기업체면을 구기지 않을 정도로는 배당을 챙기려는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정부정책이 이런 경향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정책당국자에게 있어서 증권투자자는 아랑곳없다.

주가가 폭락해 이른바 고위층에서 꾸지람이 나와야 움직인다는 시중의
얘기가 들어맞는것 같다.

조금 심하게 지적한다면 증권시장에서 투자자는 투기꾼 취급을 받고 있는
셈이다.

개미군단들은 증시를 떠날 수밖에 없다.

우선 정부당국자들이 바뀌어야 한다.

기업과 주주와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소수주주들이 정부와 기업경영진의 일방적인 독주와 밀월을 더 이상
묵인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미 국내 증시에도 이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소수주주들이 한데 모여 경영책임을 묻거나 경영권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소송마저 겁내지 않는다.

기업경영인들로선 소수주주들의 이같은 행동이 마땅치 않을 것이다.

증권투자자들의 권리남용이라고 여길 것이다.

물론 과거의 잣대로 보자면 그런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증시를 외면한다면 기업들도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는게 오늘의 상황이다.

투자자들이 기업의 주주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못하는 한 증시의 기능
회복은 지난한 일이 아닐수 없다.

증시의 건전한 발전이 없이는 기업의 성장발전도 어렵다는건 지금
경험하고 있는 터다.

이런 점에서 주주들이 우대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주식투자자를 투기자와 동일시하는 편협된 시각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상장회사들이 주주들을 우대해야 한다.

그러나 상장회사들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주주를 우대하는 기업들이 잘 뻗어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일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