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봉은 보옥이 앓아 누워 있는 대옥을 정말로 보러 가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보옥이 대옥의 모습을 보고는 충격을 받고 상태가 더욱 악화될지도
몰랐다.

"소상관으로 가도 지금 대옥 아가씨는 만날 수 없어요.

혼례 준비에 바쁘고, 곧 신부가 될 사람이 신랑 될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에요.

대옥 아가씨 자신도 쑥스럽고 부끄러울 거고요"

"그럴까? 히히, 하긴 좀 부끄럽겠군.

첫날밤 신랑에게 안길 일을 생각하면 말이야. 히히"

다행히 보옥이 희봉의 말귀를 알아듣고 도로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대옥과 혼인한다고 하니 좋긴 좋은 모양이군.

그런데 정신이 제대로 돌아와 혼인식날 신부가 대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떡한담.

혼례도 치르지 못하는 거 아냐.

희봉이 보옥이 안쓰러운 한편 앞으로 닥칠 일들이 여간 걱정스럽지
않았다.

그때 왕부인이 역시 보옥의 상태를 살피러 왔다.

보옥이 어머니 왕부인을 보자 반색을 하며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정말 감사해요.

대옥이랑 혼인을 치르도록 해주셔서. 근데 혼인 날짜는 언제예요?"

왕부인이 보옥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해 하며 희봉을 흘끗 돌아보았다.

희봉이 왕부인을 향해 눈을 끔쩍거렸다.

"아, 혼례식? 모레로 잡았지.

그날이 길일이라고 해서 말이야.

아버지는 나라의 부름 때문에 그날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부임지로
떠났으니 아버지 없이 혼례를 치르게 되었구나"

"대옥이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걸요"

이렇게 대꾸하는 것을 보면 보옥이 정신이 돌아왔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왕부인이 희봉의 옷소매를 끌어당겨 보옥의 방을 나왔다.

"점점 보옥이 분별력이 생기는 것 같은데, 신부가 대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떡한담"

"저도 그 점이 염려되지만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 두고 보세요.

근데 예단은 다 준비하셨어요?"

"어머님께 보여드리려고 이렇게 예단 목록을 적어 왔어. 보옥에게도
보여줘야 하겠지?"

왕부인이 손에 들고 있는 종이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희봉이 그 목록을 보니, 금목걸이와 금과 진주로 만든 머리 꾸미개
팔십 개, 망단과 장단 옷감 사십 필, 비단 백이십 필, 철따라 입을
옷 백이십 벌 등등이었다.

"이 예단들을 할머님께 목록으로만 아니라 직접 보여드려야 하잖아요?"

"그래서 시녀들더러 준비한 예단들을 들고 오도록 했어. 어머님이
좋아 하시면 곧 보채네로 보내야지"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