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시아에서의 중국과학의 전파 >>

나카야마 시게루 < 국제 동아시아 과기의학사학회장 >

19세기까지의 동아시아과학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중국의 전통과학에
대해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중국과 동아시아 나라들의 패러다임이 겹치기 때문이다.

나는 동아시아라는 말로 베트남 한국 그리고 일본등 중국어와 중국어휘들을
과학적개념을 전달하는 지적수단으로 채용하였던 나라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것들은 각국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정상과학으로 발달한 끝에
서양과학으로 대체되었다.

서양과학전통의 중심이 이곳저곳으로 이동할 때에는 항상 어떤식으로든지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었던 반면 동양의 전통에서는 중심이이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가 없었다.

우리가 영국의 과학사학자인 "니덤"의 첫번째 문제라고 하는것, 즉
왜 중국에 과학혁명이 없었는가의 답을 이 논문의 논점들에서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중국과학의 확산은 중국문자의 전파에 수반되었다.

서양과학전통의 중심지 이동의 경우와 달리 중국과학은 다른 문자체제의
도전을 받지 않았다.

중국지식전파의 다음단계는 중국제도의 도입이었는데 과학에 대한
영향면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과거제도와 관료체제였다.

중국의 체제를 주변부로 도입할 때 각지역은 지역적 전통에 맞추기
위해 기구들의 명칭과 조직 심지어는 교과서들도 수정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종종 지역적인 인용집단을 형성하였는데 15세기 한국의 경우에는
중국보다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주변부 사람들에게 중심부 중국은 학문의기준을 설정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주변부 사람들은 그 기준에 자신들을 견주고 때로는 이탈하였다.

이런 면에서 볼때 베트남과 한국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식 학문제도를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반면에 일본은 중국식 행정체졔를 도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에
군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중국식 학문제도를 버렸다.

일본인들은 중심부 중국에서 멀리있었던 편이어서 자신들의 패러다임을
형성하지 않았음에도 중국의 패러다임들에 압도당하지 않았다.

18세기에 서양언어원전들이 입수가 가능해졌을 때 그들은 수입된
두 패러다임을 비교하였을 뿐이었다.

혹자는 어떤 지적인 대치가 일어났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겠지만 그것은
갈등이라기 보다 비교였다.

그리하여 주로 과거제도의 부재덕분에 일본인들은 재빨리
서양패러다임으로 전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