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침상에 드러누워 얼마 전 시사에서 보금이 지은 회고시
열 편들을 머리 속으로 암송해 보았다.

보금의 시는 백 편이라도 암송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지 볼에 땀방울 촉촉히 빛나더니 나긋나긋하던 음성조차 동해로
흘러갔네 지금은 옛날 풍류의 자취만 남아 오늘도 옷자락에 향기
서리는가 "미외회고"라는 시로 양귀비가 죽은 마외 땅을 돌아보며 지은
시였다.

그런데 보옥이 생각할 때는 보금이 양귀비보다 더 곱고 아름답게
여겨지기만 했다.

보금 자신도 마외 땅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양귀비가 된 것처럼 여러
가지 감회에 젖었을 것이었다.

보옥은 또 슬그머니 보금이 보고 싶어져서 대관원을 나와 보금이
기거하는 설부인의 별채로 가 보았다.

그런데 보금의 시녀가 보금이 탐춘의 처소인 추상재로 놀러갔다고
하지 않는가.

보옥은 미리 알았으면 대관원을 나오지 않아도 되었는데, 하며 다시
대관원으로 들어와 추상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버들이 우거진 둑길인 유제를 걸어가는데, 어둑한 하늘을 배경으로
드리워져 있는 버들가지들이 귀신의 긴 머리카락들인 양 으스스하였다.

보옥의 머리로 언뜻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추상재에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나.

보옥이 좀더 걸음을 빨리 하여 추상재로 다가가 탐춘의 방 근처로
가 보았다.

그런데 방안에서 이상한 신음소리들이 새어나오는 것 아닌가.

그런 소리는 흔히 남녀가 교합을 할 때 내는 종류의 것으로 남자의
것과 여자의 것이 뒤섞이게 마련인데,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남자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여자들의 소리만 들려왔다.

"아, 이번에는 보금이가 나를 해줘. 아흐"

탐춘이 한숨 같은 신음을 내뱉으며 헐떡였다.

무얼 해 달라는 말인가.

보옥이 살금살금 창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 보았다.

등잔이나 촛불을 켜지 않아 어둠침침한 방안 침상에서 혀연 두 개의
몸뚱어리가 기이한 형태로 엉켜 뒹글고 있었다.

탐춘이 보금이라는 이름을 들먹였으므로 그 두 개의 몸뚱어리 중
하나는 보금일 것이었다.

보옥은 자기가 단번에 반해버린 보금이 탐춘과 그런 식으로 어울려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속이 메스꺼워 견딜 수 없었다.

세상 사람 같지 않게 빼어난 미인이라 여겼더니만 여자를 잡아먹는
귀신이었구먼.

보옥은 귀신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듯 달음질을 하여 유제를 지나고
노설정을 지나 정용로로 해서 운보석제를 거쳐 소상관으로 향하였다.

마침 대옥이 보채와 헤어져 막 소상관에 도착한 즈음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