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릉은 형무원으로 돌아와 대옥이 붉은 먹으로 동그라미를 쳐 둔
왕유의 시들을 한 수 한 수 읽어갔다.

밤중이 되어도 보채와 잠자리에 들 생각은 하지 않고 등불 아래에서
시를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보채는 처음에는 서운하였지만 향릉이 마음껏 공부를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 동안 얼마나 시 공부가 하고 싶었으면 저렇게 잠자는 것도 잊을까.

보채는 향릉의 등 뒤로 다가가 향릉을 살며시 안아 보고는 혼자
잠자리에 들곤 하였다.

어떤 때는 향릉이 보채에게 어려운 글자들을 묻기도 하였다.

열흘 후 향릉이 왕유의 시 전집을 들고 대옥을 찾아갔다.

"많이 공부를 한 것 같구나.

어디 한번 시를 읽은 느낌을 말해보렴"

대옥이 향릉의 입에서 시 구절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렸다.

"시의 참맛은 어떻게 말로는 다 설명을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얼핏 보기엔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기가 힘들다 말입니다.

가령 왕유의 "새상"이라는 시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지요.

"넓은 사막에는 한줄기 연기 곧게 솟고, 긴 강물에는 지는 해 둥글다
(대막고연직, 장하락일원)".

처음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연기가 곧게 솟는다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았어요.

아무리 바람이 없는 날이라 하더라도 연기가 일직선으로 곧게 솟아
오를리는 없잖아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넓은 사막의 지평선과 연기의 수직선이
절묘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더군요.

그래서 왕유의 오언율시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감칠 맛이 있었어요"

"그 정도로 시의 맛을 음미했다면 이거, 내가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겠는데"

대옥이 향릉이 기특하다는 듯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르칠 필요가 없다니요? 어려운 글자들은 읽을 줄도 몰라 보채
아가씨를 괴롭히기도 했는 걸요"

이렇게 대옥과 향릉이 왕유의 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보옥과 탐춘이 소상관으로 놀러 왔다.

탐춘은 평소에 속으로 연모하고 있던 향릉을 대관원에서 보게 되자
마치 그리운 낭군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그래서 향릉이 읊는 시를 넋이 나간 듯이 듣고 있다가 향릉을 칭찬하며
슬며시 향릉의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어깨와 허리들을 만져보기도 하였다.

대옥과 보옥은 탐춘이 저러면 안 되는데 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