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릉 언니, 늘 언니랑 이런 시간들을 가지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런
기회가 왔네.

언니가 우리 집안에 와서 유별난 오빠 모시느라 고생이 많다는 거
잘 알고 있어.

오빠가 돌아오려면 적어도 일년은 걸릴 테니까 우리 그동안 좋은
말동무가 되자구"

"보채 아가씨, 자꾸 나를 언니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냥 향릉이라고 부르세요.

송구스러워요"

향릉은 보채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아직까지 설반의 정식 첩도 아닌
입장이라 보채가 다른 시녀 대하듯이 해주는 것이 오히려 속 편할 것
같았다.

"향릉 언니는 장차 우리 오빠의 이랑뿐 아니라 본처가 될지도 모르는데,
언니라고 부르는게 뭐 어때서 그래?

영 불편하다면 언니 자 빼고 부를게"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고 이랑이니 본처니 하는 말 입밖에도 내지 말아요.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보채 아가씨, 내가 아가씨랑 있는 동안 나에게 시를
가르쳐주세요"

향릉이 보채를 향해 돌아누우며 간청을 하듯이 말했다.

보채가 향릉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대답했다.

"시로 말할 것 같으면 대옥 아가씨가 나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지.

모든 일이 그렇지만 시도 기초부터 잘 닦아야 하니까 시를 본격적으로
배우려면 대옥 아가씨한테 가서 배워.

내일 아침에 인사를 하러 가서 부탁을 하면 되겠네"

정말이지 시에 관해서는 대옥을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 보채였다.

그리고 시를 가르치는 것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닌데 지적인 호기심이
많은 향릉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보채는 향릉과 그저 이것 저것 재미나는 이야기나 주고 받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향릉의 몸 냄새를 맡기도 하고 여기 저기 만져보기도 하는
맛이 그만이었다.

"그럼 낮에는 대옥 아가씨에게 가서 시를 배우고 저녁에 보채 아가씨
에게로 돌아오면 되겠네요"

보채는 어차피 향릉과 잠자리에 함께 들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몸을
접촉하는 재미만 보면 되었으므로 낮 동안 향릉이 대옥에게 가 있는 것은
그리 개의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향릉이 대옥이 거처하는 소상관으로 가보니 대옥은
늦가을 날씨에 감기를 앓고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나은 편이었다.

향릉은 대옥에게 여차여차하여 대관원 형무원에 묵게 되었다고 인사를
하고 나서 곧바로 시를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대옥도 시를 가르칠 제자를 두어 기쁘다면서 흔쾌히 허락을 하였다.

"그렇게 시를 배우기를 원한다면 앞으로 나를 스승으로 잘 모셔야
할걸"

"그럼 여부가 있나요.

스승님, 호호"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