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부인이 급히 일어나 방을 나가자 원앙은 자기 문제로 형부인이
다른 사람과 의논을 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이 같은 문제를 가지고 와 괴롭힐 것이 아닌가.

원앙은 아무래도 몸을 피해있는 것이 낫겠다 싶어 대관원으로 놀러가려고
방을 나서며 견습시녀 호박을 불렀다.

"호박아, 대부인께서 나를 찾으면 몸이 좋지 않아 아침도 먹지 않고
누워 있다가 대관원에 맑은 공기를 좀 쐬러 갔다고 일러라"

"그럴게요. 잘 다녀와요"

원앙이 대관원으로 들어오니 아닌게아니라 속이 좀 트이면서 숨을
제대로 쉴 것 같았다.

소산을 끼고 돌아가는데 숲속에서 새소리만 들릴뿐 사람 그림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원앙은 계속해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길에
떨어져 있는 낙엽들을 밟으며 걸어나갔다.

고집이 세기로 소문이 나 있는 가사 대감이 자기를 첩으로 삼으려고
마음을 먹었다니 앞으로 일이 수월하게 마무리될 것 같지가 않았다.

정 안되면 금천아처럼 우물에라도 빠져 죽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노라니 발에 밟히는 낙엽의 신세가 꼭 자신의
신세같기만 하여 마음이 울적하기 그지없었다.

보채나 탐춘, 대옥 같은 여자들은 부모를 잘 만나 곱게 자라서 지체
높은 귀공자와 백년가약을 맺을 것이지만, 원앙 자기같은 여자들은
부모를 잘못 만나 남의 집 종살이를 하다가 결국 비천한 남자와 결혼을
해서 일생동안 고생하며 살아갈 것이 아닌가.

기껏 형편이 필 수 있는 길은 높은 분의 눈에 들어 첩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으니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결혼같은 거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나.

지금 마음 같아서는 그냥 대부인의 시녀로 평생 살아가는 것이 제일
마음 편할 성싶었다.

하지만 대부인이 언제까지나 살아계실 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 난데 없이 원앙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원앙이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평아였다.

"새 이랑님께서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요?"

평아가 놀리는 투로 말을 걸자 원앙이 버럭 화를 내었다.

"모두들 왜 이러는 거야? 누가 가사 대감의 첩이 되겠대? 근데 평아
너는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은 거야?"

"어, 마님에게서 들었지. 원앙이 너, 그리 화내지 마.

네 마음을 다 알고 있는 내가 아니니.

그래서 미리 연막을 쳐놓았어"

"네가 어떻게 내 마음을 안다는 거야?

방금도 새 이랑님 어쩌고 해놓고선"

"농담으로 그랬지"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