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봉에게도 사과하고 빌라는 대부인의 분부를 가련은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럼요. 집사람에게도 빌어야죠. 그런데 집사람은 어디 있죠?"

가련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두리번거렸다.

대부인은 시녀를 시켜 방안에 있는 희봉을 모시고 나오도록 하였다.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희봉을 보니,아침 화장도 하지 않은
부스스한 얼굴에 옷도 구겨진 그대로 볼품 없이 대강 걸치고 있었다.

포이의 아내와 엉겨붙어 뒹굴 때 맞았는지 왼쪽 눈 밑에는 퍼런
멍이 들어 있기도 하였다.

평소의 활달한 모습과는 달리 처량한 꼴을 하고 있는 희봉으로
인하여 가련은 자기 잘못을 더욱 깨닫고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술만 들어가면 희봉의 눈을 피해 다른 여자를 안고 싶고
희봉이 귀찮은 존재로만 여겨지니 그놈의 술이 원수인 셈이었다.

가련이 몸을 일으켜 희봉에게로 다가가 손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자 희봉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허허, 용서를 비는 사람이 어디서 쪼르르 달려가고 그러나.

엎드려서 큰절을 올려야지"

대부인이 한마디 하자 가련은 다짜고짜로 희봉 앞에 엎드리며 큰절을
올렸다.

"마님, 이 불초 죄인을 용서해주십시오"

가련은 마치 시녀나 하인이 주인에게 용서를 빌 듯이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대부인과 형부인이 비씩 웃고 말았다.

희봉도 고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낭군이 엎드려 비는데 희봉이도 용서를 해줘야지 어떡할 텐가"

대부인이 가련 부부의 화목을 위해 양쪽을 다독거렸다.

형부인은 옆에서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희봉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은채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내려고
그러는지 심호흡을 몇번 하였다.

"평아도 여기로 데려오도록 하여라"

대부인이 이번에는 시녀를 시켜 대관원 도향촌에 있는 평아를 오게
하였다.

대부인의 처소로 들어서는 평아를 보니, 희봉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새옷에다가 고운 분과 연지로 얼굴 화장을 말끔하게 하고 있었다.

그제야 희봉이 이런 누추한 모습으로 나온 자신이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때가 늦고 말았다.

보옥의 선물로 인하여 하루 아침에 더욱 예뻐진 평아를 바라보는
가련의 두눈이 순간적으로 휘둥그레졌다.

그러다가 희봉의 눈치를 보며 다시 평상으로 돌아왔다.

"누구보다 억울하고 분한 것은 평아일 테니 두 사람이 평아를 잘
위로하도록 하여라.

집안 상하가 두루 화목해야 그 집안이 잘 되는 법이야"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