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지금 누구를 치겠다고 빗장을 빼들고 이러세요.

설반 오빠가 고자질을 한 것이 아니면 됐잖아요.

이렇게 소란을 피우다가는 사람들이 정말 설반 오빠가 고자질을 한
것으로 알겠어요.

그러니 제발 고정하세요"

보채가 말리며 달래는 말에 설반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난 안다구. 네가 매사에 왜 보옥이 편만 드는지 그 이유를 안단
말이야.

어떤 중이 앞으로 네가 옥을 가진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배필이
될거라고 했다며?

보옥이 통령보옥인가 통통보옥인가 하는 걸 차고 있다고 보옥을 장차
네 낭군이 될 자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헛물 켜지 마.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아예 처음부터 쳐다보지 않는 게 상책이야.

그리고 보옥이 남자구실이나 제대로 하는지 모르겠어.

지난번 풍자영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도 말이야, 보옥은 여자들
한테는 관심도 없고 기관인가 하는 남자배우하고만 히히덕거리며 서로
허리띠를 풀어주고 하면서 추잡을 떨더란 말인야"

"어머님, 오빠 하는 말 들어보세요"

보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설부인의 등 뒤에 이마를 묻고는 분을
참지 못해 흐느껴 울었다.

그렇게 보채를 울린 설반은 미안한 생각이 드는지 슬그머니 빗장을
내려놓고는 비틀비틀 대문을 빠져나갔다.

보채도 어머니 설부인에게 밤인사를 드린 후 형무원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보채는 마음이 여전히 울적하여 머리도 제대로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은채 옷만 대강 걸치고 어머니에게 아침인사를 드리러
대관원을 나오다가 취연교 근처 꽃그늘에 서 있는 대옥을 만났다.

대옥은 보옥이 기거하고 있는 이홍원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보채는 대옥에게 말을 걸까 하다가 자기 몰골을 생각하고는 그냥
자나쳤다.

대옥은 보옥에게 병문안을 하기 위해 이홍원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훔쳐보고 있는 중이었다.

대부인을 비롯하여 왕부인, 형부인, 이환, 영춘, 탐춘, 석춘 등이
들어갔다.

대옥은 그런 광경을 보면서 부모가 있는 자는 병이 들어도 위로하는
자가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부모가 없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또 시름에 젖었다.

그때 시녀 자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아가씨, 아침부터 이렇게 습한 곳에 서 있으면 어떡해요?

어서 돌아가 약을 잡수셔야죠. 끓여놓은 물이 다 식겠어요"

대옥이 자견에게로 돌아서려는데 어찔 현기증이 일었다.

대옥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몸을 가누려고 하자 자견이 얼른 대옥을
부축하여 소상관으로 향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