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부라는 단어에는 비하의 뜻이 담겨 있다.

돈은 좀 있는지 모르지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듯 눈치없고
경망스럽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두고 졸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나라는 사람들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졸부근성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경우,그 나라 전체가 졸부국으로
몰릴 수 있다.

특히 나라를 대표하는 정부수반 외교관 통상관료등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졸부같이 행동하면 나라 전체가 졸부국으로 매도될 수 밖에 없다.

최근 정부의 대외 외교자세를 뜯어 보면 마치 졸부국의 오명을 스스로
쌓아가려고 발버둥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일반 사람들의 경우에도 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상대방이 잠자는 시간을
피하는게 예의다.

국가와 국가간의 예의는 더 각별하다.

의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를 찾은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우리 모두가 잠들어
있는 새벽 5시에 제주도를 찾았다.

실무 회담이었다고는 하지만 의전을 중시하는 외교관례상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부는 당초 클린턴 대통령이 선거일인 4월11일 이전에 방문해 주기를
희망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클린턴의 바쁜 일정과 한국선거와 관련, 야당으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난색을 표명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클린턴의 방문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정부의 집요한 요청때문에
외교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정을 잡게 됐다는 것이 미국측의 입장인
모양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비하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OECD 가입문제만 해도 그렇다.

OECD야말로 선진 신사국들의 사교클럽이다.

품위있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교클럽 멤버십은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우리들의 정서이다.

나비 넥타이 매보려고 추태를 보이기 보다는 차라리 청바지 입고 내면의
품위를 유지하고 말겠다는 배짱 또한 때로는 바로 박힌 생각인지 모른다.

현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OECD 회원국은 일본밖에 없다.

때문에 이 지역의 중요성과 한국의 위상을 알고 있는 회원국들은 이미
우리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기로 내심 정하고 있다는 것이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판단이다.

준비만 잘 해놓고 조용히 기다리다 보면 자연히 굴러 들어오게 돼 있는
것이 OECD 티켓이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하루라도 빨리 티켓을 따야겠다는 일념에
안달이 나서 뛰어 다니는 꼴은 추태 바로 그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를 돈 생겼다고 금배지 한번 달려고 품위없이 행동하는 졸부에 비유
한다면 지나친 일일까.

4월초 파리 OECD 사무국에서는 자본이동과 경상무역외 거래상의 자유화
유예문제를 다루는 회의가 열렸었다.

다섯명 정도의 정예 대표단이면 충분했으리라는 것이 주변의 평가다.

그러나 한국에서 파견된 인원은 관련 차관보를 포함, 무려 30명에 가까운
숫자였고 현지에 이미 나가 있는 지원반까지 합하면 40여명이나 투입됐다는
후문이다.

속말로 "OECD가 뭐길래"라는 볼멘 소리가 저절로 나오더라는 것이 주위의
평가였다.

최근 제시된 남.북.미.중 4자회담의 경우를 보자.러시아는 남북한을 둘러싼
강대국이지만 이 명단에서 빠져 버렸다.

일본 또한 마찬가지다.

러시아와 일본이 이 틀에 반드시 끼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4자 회담이야말로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토의를 진행시킬수 있는 방식인지
모른다.

어찌됐건 일본은 4자회담에 지지를 보낸다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본심과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일본의 지지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옐친이 강택민과의 정상회담 과정에서 4자회담에 대해 대놓고 비판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꺼풀만 열고 들어가면 러시아가 한국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외신의 전언이다.

공산정권의 몰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러시아지만 수년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양대 축을 형성하던 대국이었다.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제고를 위해 30억달러라는 돈냄새를 풍기며
우리가 집요하게 매달려야 했던 공산 종주국이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하루 아침에 대접을 달리한다면 당하는 쪽으로부터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러시아와 일본인들 입에서 "졸부국 한국이 우리를 흘대했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