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영 < 생명보험협회 이사 >

작년 6월 33개 생명보험회사의 보유계약이 1,000조원을 돌파했다.

국민 한사람당 2,300만원씩 보험에 가입한 셈이다.

연간 수입보험료가 34조원에 육박하고, 총자산도 지난해 연말기준으로
67조원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1,200만 가구중 600만 가구가 생명보험에 가입했고, 금융기관
저축액중 생명보험의 비중이 11%대를 넘나들게 됐다.

이러한 성장결과 우리나라 생명보험은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에 이어
세계 제6위 보험국으로 자리잡게 됐다.

지난 30여년간 줄기차게 성장해온 생명보험은 그 양적 성장에 놀라워 하기
보다는 사회보장제도가 미흡한 우리나라 실정에서 국가가 할수 없는 사회
보장기능을 민영 생보사가 그 역할을 대신 보완해 왔다는 점에서 가슴
뿌듯하게 생각한다.

연간 22조원의 보험금지급 규모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뿐만아니라 생명보험은 자칫 소비성향으로 흐를수 있는 소비자금을 산업
자금화하고 통화안정, 물가안정에도 기여했다는 측면에서 그야말로 "티끌
모아 태산"의 역할을 해냈다.

이같은 생명보험의 경제-사회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생명보험"이 여전히
이미지 측면에서 국민들로부터 대폭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고,
생명보험이 국민의 생활필수품시대가 되었으면서도 아직까지 생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고쳐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책임은 물론 우리 보험인 모두에게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보는 중도에 해약하면 원금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
"보험모집인이 귀찮게 군다" 등과 같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생명
보험"이라는 용어가 주는 거부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근대 생명보험의 출발은 1762년 영국의 이퀴터블(Equitable) 생보회사가
시초이고 독일에서는 1806년, 미국은 1809년 각각 최초의 생보회사가 설립
되었다.

이때 사용된 용어가 "라이프 어슈어런스(Life Assurance)", 또는 "라이프
인슈어런스(Life Insurance)"였다.

동양권에서는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지(복택유길)"가 1867년 미국 여행을
다녀와서 "서양족 안내"라는 책에서 보험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때 사용한
용어가 "재난보장(재난청합)"이었다.

그 이후 10여년간 용어정립 과정에서 생명을 "인명" "성명" "생활"이라는
용어로 혼용하다가 1880년 메이지 생명의 전신인 도쿄생명보험회사가 창립
신청시 최초로 "생명보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한편 중국에서는 사망 생존 상해를 포함한 총괄명칭을 "인신보험"으로,
사망과 생존만을 보장하는 보험을 "인수보험"으로 각각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생명보험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891년 일본계 제국생명
(제국생명)이 우리나라에 대리점을 개설하면서 부터인데 여과없이 용어가
그대로 정착되어 1921년 한상룡이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를 설립할때는
완전히 고착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생명보험이 처음 출발할 때에는 그야말로 사람의 생사에 관해서만 보장
하였기 때문에 이 용어가 그대로 인정될수 있었으나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를 넘어선 현시점에서는 생명보험이 보장하는 범위가 엄청나게 넓어져
"생명보험"이라는 하나의 그릇에 담기에는 너무나 벅차기도 하지만 용어
자체가 맞지 않기 때문에 이를 바꿔야 할 때가 왔다.

노령화사회와 함께 연금보험이 생보전체의 50%가까이를 차지하고 있고,
각종 질병에 대비한 건강보험 가입자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명보험의
한 분류로 이러한 보험을 열거할수는 없다.

이들을 모두 담아낼수 있는 그릇은 "생활보험"이란 용어이다.

현재 보험모집인이란 법적용어도 "생활설계사"라고 부르고 있지 않는가.

구미 각국의 경우도 보험법상 라이프 인슈어런스의 범위에 생명보험 연금
상해-건강보험 결혼보험 변액보험 등을 열거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가
"생활보험"으로 바꾸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50여년이상 써오던 국민학교도 초등학교로 바꾸었다.

생명보험 용어를 바꾸는 일은 비록 시간이 걸릴지 모르나 "생활보험"으로
바꾸어야 생명보험의 이미지도 좋아지게 된다.

학계 보험업계 정책당국이 모두 나서서 연구검토해야 할 시점에 온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