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대옥과 헤어져 자기 방이 있는 이홍원으로 돌아가는데 습인이
저쪽에서 총총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습인아, 어딜 가는 길이야?"

보옥이 묻자 습인은 보옥의 아래 위를 훑어보면서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딜 가긴요.

도련님을 찾으러 가는 길이죠.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예요? 오후
내내 찾아다녔잖아요.

그리고 옷에 묻은 그 흙먼지랑 꽃잎쪼가리들은 또 뭐예요?"

보옥은 자기 옷과 두 손을 내려다 보며 싱긋이 웃었다.

"어, 이거? 대옥 누이랑 꽃잎들을 모아다가 꽃무덤에 묻어주느라고"

대옥이라는 이름이 보옥의 입에서 나오자 습인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지금 꽃무덤이 문제예요? 대부인 마님께서 아까부터 도련님을 찾고
계시단 말이에요.

큰댁 대감님이 아프신 모양인데,거기 문병 갔다 오시라구요"

큰댁 대감이면 보옥의 큰아버지인 가사 대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또 아프신가? "

보옥은 뒷머리를 손으로 긁적이며 습인을 따라 일단 자기 방으로
향했다.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대부인에게로 갈 참이었다.

보옥이 습인과 방으로 들어오니 원앙이라는 시녀가 침대 위에 비스듬히
엎드려 습인이 꽃수를 놓은 베갯잇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황급히 일어나려
하였다.

"더 구경해도 좋아"

보옥이 그렇게 말하자 원앙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베갯잇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거듭 감탄을 하였다.

습인은 자기 솜씨를 칭찬해주니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원앙에게 핀잔을
주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습인은 보옥이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가고 방에는 보옥과
원앙만이 남게 되었다.

보옥이 침대에 걸터앉아 단화를 벗고 장화로 바꿔 신으면서 옆으로
고개를 돌려 원앙을 바라보니, 복사꽃빛 비단저고리에 검정 비단조끼를
입고 흰 띠로 허리를 질끈 두른 모습이 여간 육감적이 아니었다.

게다가 꽃무늬가 화사하게 새겨진 옷깃 위로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가
눈부실 지경이었다.

저렇게 곱고 아름다운 목덜미가 다 있나.

보옥은 속으로 탄성을 발하며 슬며시 원앙 옆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원앙은 보옥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베갯잇만 구경하고
있었다.

보옥은 원앙의 목덜미를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겨 아예 목에다가 코를
박았다.

원앙의 몸 전체에서 우러나오는 듯 향긋한 향유 냄새가 보옥의 코로
스며들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