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사건으로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힌 가운데 국민의 관심이
온통 사법부에 쏠려 있는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행정부와 입법부가
거의 일손을 놓고있는 모습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다.

김영삼 대통령이 지난 3일 국무위원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에게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국정현안을 꼼꼼히 챙기도록 특별당부한 것도
행정의 이완분위기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수 있다.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일손을 놓고 복지부동하는 것이 우리 공무원들의
고질적인 버릇이지만 정기국회 회기중인데도 국회의원들의 관심이
의사당을 떠나 다른곳에 가 있는 모습은 무슨 이유로든 납득하기
어렵다.

이번 정기국회는 국정감사가 끝났을 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차분하고
내실있게 운영되고 있다는 평을 들었었다.

그러나 국감이 끝나고 각 정당들이 내년4월의 총선작전에 돌입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하더니만 비자금사건이 불거지면서 국민은
물론 국회의원 자신들마저도 국회활동을 외면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물론 예결위등 몇몇 상임위가 열리고는 있지만 소속 의원들과 언론의
철저한 무관심속에 대다수 국민들은 지금 국회가 열리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는듯 하다.

14대국회의 마지막 예산국회인 이번 회기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정부가 제출한 63조36억원이라는 예산안을 심의.통과시켜 내년도
나라살림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할 막중한 책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은 총예산증가율이 14.9%에 이르는 팽창예산
인데다 그 내역도 선거를 의식한 정치논리로 뒤틀려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터여서 어느때보다 철저한 심의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그런데도 비자금파문에 가려 예산심의가 건성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음은 심히 유감스런 일이 아닐수 없다.

예결위의 일부 의원들이 제대로 출석조차 하지 않거나 아예 지역구에
내려가 선거운동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얘기가 들리는가 하면 국회활동
보다는 비자금과 관련된 당내 전략을 짜는데 몸과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소식이다.

만일 각 정파가 비자금파문을 당리당략에 이용하는데만 매달려 예산
국회 운영을 소홀히 할경우 이땅에서 의회정치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해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비자금수사에 관심을 갖는것 자체를 나무랄수는 없지만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만큼 국회는 국회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비자금 사건으로 사회에 허탈감이 만연해졌다 하여 가계를 팽개치는
국민이 없듯이 국회의원도 나라살림이 어떻게 되든 나 몰라라 할수는
없는 일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각 정당 지도자들도 비자금정국돌파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소속 의원들을 자신의 주변에 묶어둘 것이 아니라
본연의 일터로 돌아가게 해야할 것이다.

비자금 캐내기도 중요하지만 민생 안정 및 경제 각부문의 경쟁력 기반
강화와 직결된 나라살림 걱정도 해야할 것이 아닌가.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