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는 중세기때부터 법정에서 동물재판이 벌어진 일이 자주 있었다.

사람을 재판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정의 법절차에 따랐고 관선변호인을
선임하여 변론을 하게 함으로써 재판에 공정을 기했다.

동물재판 사운데서 가장 진기했던 것은 18세기초 브라질의 와라냐오주에
있는 프란시스코회 수도사들이 식량과 가구를 먹어치우는 흰개미들을
고소한 사건이었다.

범행을 변호하도록 법정에 소환된 흰개미들은 관선변호사 한사람을
배정받았다.

그 변호사는 법정에서 "희개비들이 토지의 원소유주이고 그들의 근면성이
수도사들을 무색케 하는 것"이라는 유창한 변론을 했다.

오랜 재판끝에 판사는 쌍방이 서로 행실을 바로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흰개미들은 수도사들을 괴롭히는 일을 즉각 중지하고 수도사들도
흰개미들을 못살게 괴곱혀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판사는 그 판결문을 흰개미들이 사는 개미집에다 대고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

동물재판도 이럴진데 인간대판에서는 더욱더 신중을 기해야 함은
물론이다.

일찌기 소크라테스는 재판관이 갖춰야 할 세가지 요건을 제시한바
있다.

친절하게 듣고 빠진 것 없이 묻고 냉철하게 판단하고 공평하게 판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재판관이 그러한 태도로 재판에 임하는 한 공정성을 잃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법률소비자연맹이 지난7월 한달동안 서울 고법과 지법의
민사재판 광경을 조사한 결과 판사의 43명가량이 졸면서 재판을
진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당혹감을 갖게 한다.

소크라테스의 지적에 비추어 본다면 첫번째 요건을 상실한 재판관의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수 없다.

공개된 법정에서의 변론이나 진술의 잇점은 소송당사자 쌍방이나
증인들이 <>중위를 의식하여 허위진술을 삼가할 가능성이 크고 <>모순
되거나 애매모호한 진술부분을 바로 잡을수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더더구나 재판관은 당사자 쌍방이나 증인들의 법정진술을
외면하고 있을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판결은 물론 법정에서의 변론이나 진술을 거쳐 재판부에 제출된 서면
소송자료와 증거자료,또는 소장과 답변서 준비서면에 근거하여 내려지는
것이지만,법정에서의 재판의 존재이유를 십분 살리려면 일부 법정에서의
잘못된 관행은 바로 잡혀져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