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되던 날은 올여름처럼 무더웠다.

그뒤로 50년,대한민국 47년이다.

1995년8월의 오늘 과연 한국인이 그리는 자화상,자기정체는 어떤 것인가.

이에 총의를 못이루면 내일이 밝지않다.

인간의 자화상은 주관적이다.

그중에도 한국인만큼 자기정체를 놓고 끌탕하는 민족이 드물성 싶다.

사사건건 우리가 누구인가로 속을 끓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리기
힘들다.

그 뚜렷한 증세가 두가지다.

역대정권의 정당성을 둘러싼 끝없는 갈등,세계속 한국의 위상에 대한
엇갈린 자의식이 그것이다.

끝없이 매연을 뿜어대는,지역감정 감투싸움 버금가는 화근이다.

정권의 정당성은 역대 위정자에 대한 평가로 가름된다.

도대체 역대 여섯대통령, 총리 한사람 통틀어 군말없이 "훌륭한 지도자
였다"는 평듣는 사람 있는가.

없다.

몽땅 엑스다.

그 원인엔 학교교육도 유죄다.

당대 대통령의 신격화에 길들여진 청소년들이 사회입문후 맞닥뜨리는
혼란은 이미 땅에 떨어져 뒹구르는 신화다.

불후의 영예를 탐내 대통령직에 연연한다면 아예 단념하는 편이 현명하다.

그런 환각속에서 평생을 사는 병자들이 적지않음을 슬퍼하는게 아니다.

좋건 싫건 국민의 이름으로 옹립됐던 일체의 기존 권위가 부인되는 이
사회의 불모성을 중대시하지 않을수 없음이다.

역대 왕에도 이의없는 성군은 세종말고 없다.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조지 워싱턴도, 피터대제도 성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를바 없다.

오직 다른 점은 완전인간의 인정여부다.

사람을 흑백논리로 선악 양분하는데서 차질은 예정된다.

선인으로 받들어진 인물이 악인으로 추락하는 것은 시간문제, 주어진
운명이다.

인간에 완전선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역사가 간과해서 안될 것은 인물의 시대적 역할이다.

이승만도, 박정희도 그시대 최적의 선택이다.

최적이란 뜻은 가치 최고와 구별되는, 진화론적 적자생존적 최적이다.

그시대 그인물의 업적이 "그 경우 그렇게 하지 않기를 그에게 기대할수
있느냐"는 기대가능성을 준거로 삼아 최대치 근접 여하로, 좀더 단순하게는
역사에 대한 기여에 있어 순기능 역기능중 어느쪽이 컸느냐로 평가하면
족하다고 본다.

그외에 어떤 형용사도 야사의 영역이다.

그 대표가 이박사의 친일파 불처벌과 5.16의 불가피성이다.

거기 비하면 5공성립에 대한 공감은 불가피성으로나 기대가능성으로나 아주
낮다.

5공시비의 초점은 동전의 양면같은 두 측면이다.

첫째는 주역들이 12.12,5.17,5.18을 계획적으로 유도했건 기화로만 이용
했건 적어도 그런 사태가 없었다면 그들의 집권 개연성은 무라는 객관성이
핵심이다.

다른 측면은 5공이 있음으로써 6공이 있고, 6공때 3당통합이 있음으로써
현정권의 탄생이 용이했다는 연쇄조건을 토대로 15년동안 누적된 정치
기성고의 번복이 불가능한 현실이다.

반란죄 고발이 끊이지 않고 초거액 예금설이 꼬리를 무는 이유, 그런데도
검찰(국가)이 애써 위화도 회군-성공한 쿠데타의 언설을 농하며 기소회피를
감내하는 속뜻은 삼척동자도 모르지 않는다.

이 빤한 희극은 언제까지나 반복돼 국력을 소모할 것인가, 아니면 속시원히
할 말을 공론에 부쳐 단락을 짓고 할 일을 할것인가 선택할 시간이다.

그러려면 대전제가 선행된다.

그것은 장본인들이 나대지 않고 근신하는 모습이고 그이상 왕도가 없다.

산사의 고행도 심중 분한데,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얼만데 등 아집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무수한 사람에게 한을 심었다는 자괴가 무엇보다 소중하다.

혹 양위한 상왕의 환상이 불무라면 문제가 꼬일 따름이다.

그렇게만 되면 부수문제, 즉 그 새 궤도위에 역사가 웃자라고 그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출세 치부한 10유여년의 기성질서를 뒤엎자는 비현실적
협기는 자제될 것이다.

다음은 전후 50년 한국의 결산이 흑자냐, 적자냐의 엇갈림이다.

대단히 우국적인 부정이 끈질기게 제기되어 오고 있지만 분명히 말할수
있는 것은 5천년 역사상 없던 대약진을 현대의 한국인이 이루어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 핵심은 60년대이후의 경제성장이다.

이에 대한 어떤 가감도 기만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성취를 완료형으로 보는 자만이 아니라 언제라도 무산될지
모를 진행형이라 보는 겸손이다.

잇따르는 붕괴는 사상누각이 무너지는 사필귀정이다.

누가 모래위에 누각을 지었는가.

집권자의 고속 강박감, 일확천금 경쟁, 정치자금 공제로 공사 착복한
정당놀음, 봉투에 맥을 못춰 부실 덮어주는 관의 상습이 모두 유죄다.

소방도로 못뚫고 삐뚤빼뚤 서울이 재건되는 동안 오간 봉투수를 상상만해도
현기증이 나지만 여기가 가다듬어 부패의 연대성을 반성할 대목이다.

길을 막고 봉투한번 건네지 않은 사람 나오라면 단 한사람 있을까.

돌 던질자 누군가.

암담하다.

개혁지속 희망이 80몇%였다지만 저한테 손톱만큼 손해갈 개혁일랑 마다하는
세상이다.

여기서 솔직하자.

어느 종교단체의 "내탓이오"운동을 남의 얘기처럼 시큰둥하면 이제 백약이
무용이다.

왜 이치를 알면서 눈가리고 아옹하나.

포도주 추렴에 나하나쯤 하고 물을 타는 심리다.

쓰레기 교통 취학 출세 대통령되기 까지 모든 세상사에 유죄는 이 심리다.

만일 이것이 "나하나 물탐으로써 전부가 물된다"로 바로잡힐때 문제는
풀린다.

한마디로 말하면 반세기의 자화상은 세계에 부상한 유수국이다.

단 총독부건물 부숴야 성이 풀리는 안달보다 그 지붕위에 상징적 구조물
덧씌워 활용하는 극복의 야망이 아쉬운 오늘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