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 손을 들자니 영상사업이 울고, 도시바 편에 서자니 CD사업이 눈에
밟힌다"

차세대 영상기기인 DVD(Digital Video Disk)의 표준규격제정을 둘러싸고
세계"슈퍼파워"간 샅바싸움이 치열해지면서 국내업계가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다.

DVD의 표준규격을 제시한 업체는 도시바를 중심으로 한 SD(Super Density)
진영과 소니를 주축으로 한 HD(High Density)진영.

세계 전자업체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양쪽중 한 편에 줄서기가
한창이다.

표준화에 동참해 기득권을 확보하려는 생존전략에서다.

하지만 국내 업체들은 마냥 꿀먹은 벙어리다.

"고래"싸움에 등이 터지는 "새우"꼴이 되지는 않겠다는 속내 탓이다.

좋게 말하자면 신중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정확히는 "양다리 걸치기"와
다름없다.

실제로 세계 비디오 기술을 양분하고 있는 두 "슈퍼파워"간의 표준화
주도권 다툼은 선뜻 승부를 가리기 힘들 만큼 팽팽한 양상이다.

쟁점은 디스크 정보입력 방식이다.

SD계열은 DVD의 양쪽면에 정보를 넣자는 것이고 HD계열은 한쪽면만 활용
하자는 주장이다.

정보 입력방식에 따라 하드디스크의 구조가 결정된다.

양측은 전혀 호환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표준기술로 채택되는 측은 세계 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반대로 실패할 때는 사업진출의 기회가 사실상 막힌다.

이래서 양진영은 "도 아니면 모"라는 생사결단의 자세로 자신의 기술을
표준화하려고 달려들고 있다.

국내 업계는 그러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못하고 있다.

한쪽 편으로 치우칠 경우 다른 쪽 기업들의 "심기"가 불편해질게 뻔하기
때문.

가전3사를 비롯한 국내업체들은 소위 "괘씸죄"에 걸릴까봐 조심하고 있다
(LG전자 엄성현 레코딩디스크 연구실장)는 얘기다.

SD계열에는 일본 도시바 마쓰시타 파이오니아등 전자업체외에 미국의
타임워너 MCA등 영화회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상소프트회사인 디즈니사도 가담을 선언했다.

반면 HD계열에는 필립스가 있다.

필립스는 CD계열의 상품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광픽업에 관련된 핵심기술
을 보유하고 있다.

CD-I등 광기술응용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필립스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국내업계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SD계열에 동참하자니 필립스로부터 광픽업기술을 이전받지 못할 것 같고,
그렇다고 HD쪽에 줄을 서자니 영상소프트분야 진출이 장애를 받을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도"냐 "모"냐를 결정해야 될 상황인데도 눈치살피기로 그 "결단"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 것이다.

올초 DVD시스템을 개발한 LG전자는 "한국형 독자표준"이라고만 강조했을
뿐 소니와 마쓰시타 어느쪽에 가까운 것인지에 대해선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다른 가전사들도 상황은 대동소이하다.

대우전자 VTR연구소 이창우차장은 "국내업계는 양쪽의 기술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기술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며 "양측 진영간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이런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두 기술을 모두 개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DVD는 내년 상반기중 본격 상용화될 전망이다.

국내업체들이 한 가지 기술이라도 자체 개발하기에는 벅찰 정도로 시간이
없다.

"표준 규격문제가 빨리 매듭지어지기를 바랄 뿐"(LG전자 엄실장)이라는
업계의 입장은 이같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DVD표준규격 제정문제로 국내업계의 기술현주소는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세계 산업계를 리드하는 위치는 고사하고 아직도 기술도입선
의 눈치를 봐야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지요"라는 한 전자업체
기술개발담당자의 지적을 국내업체들은 요즘 아프게 곱씹고 있다.

< 조주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