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서는 동래부사가 왜관의 수문장에게 하달하여 정문에 게시하게 한
전령서였다. 그 내용을 그대로 적어서 히로즈가 보고서와 함께 보내왔는데,
각료회의에 회부하고자 그것을 복사한 것이었다.

이와쿠라를 특명전권대사로 한 구미사절단이 태평양을 건너간 뒤에도
잔류해 있는 신정부의 수뇌부와 조선국 사이에는 수교문제로 인한 알력이
계속되고 있었다.

1872년, 그러니까 사절단이 출발한 이듬해 1월에 외무성 관리인 모리야마
시게루와 히로즈 히로노부, 그리고 사가라 마사키등이 조선국 동래부로
파견되었다. 그들이 가지고 간 것은 폐번치현에 관한 외교문서였다.

번을 없애고, 대신 현을 두어 전국을 중앙정부가 관장하게 되었으며,그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조선국과의 창구 역할을 했던 쓰시마번도 폐지되고
현으로 바뀌었으니, 앞으로는 외무성 관할하에 교역과 기타 모든 교섭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통고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모리야마를 대표로 하는 그들 일행은 증기선을 타고 동래 앞바다
까지 직행했다. 쓰시마번에서는 지금까지 범선으로 가는 것이 상례였다.
설령 본토에서 사신이 기선으로 출발했다 하더라도 쓰시마번의 이스하라
항구에서 범선으로 갈아타고 가게 마련이었다.

연기를 내뿜는 증기선이 나타나자 동래부에서는 아연 긴장했다. 흑선을
조선국에서는 이양선이라 하여 개국을 강요하러 오는 군함으로 알고
적대시하고 있는 터였다.

몇해 전에는 대동강에 나타난 미국 상선 셔먼호 사건이 있었고,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 함대와의 싸움인 병인양요가 있었으며, 바로 한해 전에도
강화도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한 미국 함대를 물리친 신미양요를 겪은
터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동래 앞바다에 나타난 이양선이 일본의 외무성 관리가 타고온 기선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동래부에서는 철시를 단행했다. 매일 아침 식량과 일상
필수품을 왜관에 공급해 주는 것을 조시라고 했는데, 그것을 중단해
버리는 것이 철시였다.

철시까지 단행했는데, 그들이 가지고 온 외교문서를 접수할 턱이 만무
했다. 기선이 아닌 범선으로 왔다 하더라도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철시는 안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해 9월에는 외무대승(국장급)인 하나후사 요시도모가 두척의 군함을
이끌고 동래 앞바다로 진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