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의 여가모임이나 성인들의 이른바 비공식조직은 대부분이 모임
명칭이나 성격이 처음부터 분명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대개는 출신지역이나 동창들의 모임,또는 어떤 특별한 계기로 인해 이를
기념하기 위한 모임등 그 시작부터 모임의 목적을 세우고 모이는 게 보통
이다.

필자가 함께 하고 있는 모임은 특별한 목적없이 생겨난 점에서만 그런
모임에 비해 "특별할 뿐",순수한 직장인들의 우정어린 만남이 낳은 평범한
모임이다.

중동건설붐을 타고 주식시장에서 한차례 건설주 상승의 돌풍이 지나간
70년대말의 증권계는 몹시 어려웠다. 89년초이후 시장이 고꾸라지면서
깡통계좌가 속출하고 목숨까지 버리는 사태가 있었는데 사실 당시는 그보다
더 후유증이 심각했다.

우리는 같은 회사의 조사부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다. 당시 증권사의 조사
업무는 지금처럼 컴퓨터로 치밀하게 정보수집이나 투자분석을 하는 게
아니고 단순히 시장기조에 편승한 심증분석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건설주
파동도 그런 얄팍한 분석과 루머가 판치던 시대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우리도 어렵기는 예외가 아니었다. 벌어놓은 돈도 대부분 날리고 빚도 꽤
생겼다. 그러나 우리는 소줏잔을 사이에 두고 아픔을 나누다가 그같은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주식시장이 점점 더 합리적으로 움직일 것이란
생각에 이르게 됐다.

여기서 다시 힘을 얻은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각종 투자
설명회를 열면서 투자자들의 합리적인 투자를 이끌기에 최선을 다했다.

하루하루의 일정을 거의 군대처럼 보내면서 일에 매달리는 우리에게
어느새 붙여진 이름이 "역전의 용사"이다.

현재 동양증권 상무인 이강천씨는 이때부터 남다른 실력을 발휘해 명성을
떨쳤다. 조사부장을 역임하다 지금은 현대증권 중앙지점과 강남지점을 맡고
있는 지원룡씨와 이종태씨, 현 동양증권 투자분석부장인 고경웅씨도 그때
함께 고생하고 연구하며 우의를 다지던 면면들이다.

이밖에도 매사에 일처리와 판단력이 워낙 날커로워 면도날 박으로 불리는
현대증권의 박영철차장,허정욱차장,서울증권의 홍한표차장도 자주 모이는
멤버이다.

일정한 틀은 없지만 우리는 한달에 한번 꼴로 모여 우리가 모든 정열을
바쳐 일하던 때를 돌이켜 보곤 한다. 모두가 괴로움과 좌절에 빠져 있을
때 과감하게 새로운 조사업무의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하다. 그래선지 당시를 얘기하면 누구나 고생담과 함께 미래의
비전을 가지려했던 우리들의 진지한 자세에 대한 은근한 자랑얘기가
자연스레 나온다.

한 부서에서 일한 것이 이렇게 오래 기억되고 아직도 강한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이같은 자부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사회
곳곳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모두가 힘에 겨워 주저앉으려 할 때야
말로 젊은이들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성취할 수 있는 때라고 말해주고 싶다.
동고속에 장래의 동락이 있지 않나 한다.